“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아는가? 또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듣는 것도 기술이 있고 훈련해야 될 대상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았는가? 우리들은 흔히 “터진 입”이라고 말을 너무 함부로 하고 또 “그냥 달린 귀”라고 자기가 듣고 싶을 때만 듣고 싫을 때는 “자동 셔터 장치”를 그냥 가동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일들은 부부 사이에 가장 흔히 일어난다.

세상에서 가장 쉽게 그리고 편하게 대할 수 있는 대상이 배우자이니 만치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말을 막 해 버린다. 가끔은 말을 퍼붓다가도 미안한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내친김에 마저 다 쏟아 버린다. 그래 놓고도 사과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래도 아내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편이지만 “속이 좁아 터진” 남편들은 “남자의 체면이나 체통” 때문에 쉽사리 “미안해!”라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럴 때 아내의 가슴속에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쌓이고 쌓이게 된다.

그 뿐인가? 아내가 조금 말이라도 할라치면 “시끄러!”가 다반사요, “결론만 말해! 여자가 뭘 그리 주절주절하게 늘어놓고 있어?”하면서 말문을 닫아 버리는 게 보통이다.
뭔가 잘못한 일이 있어도 “그 정도 실수는 별 것 아니다”라는 생각이 꽉 지배하고 있어서 좀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부부 사이의 이런 문제는 가정에서만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본 회퍼”의 예리한 지적은 하나님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이다. 항상 내 주장만 앞서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은 그 “못된 버릇”을 하나님에까지 한다는 것이다. 기도를 해도 내 주장만 하고 말아 버린다. 깊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뜻을 찾는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우선 듣는 것부터 훈련해야 한다.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녀의 말에도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연습을 시작해야 한다.

가끔은 말도 되지 않고 횡설수설하더라도 인내로서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말을 들을 때는 단지 소리로 들리는 말만 듣지 말고 몸으로 표현되는 말도 들으라!

말에 들어 있는 의사 소통의 종류는 3가지가 있다.
‘액면 그대로의 말’이 있는가 하면 ‘실제 말한 것과 다를 수도 있으나 말하고자 했던 것’이 있다. 또 “실제로는 표현되지 않았으나 넌지시 암시한 것”도 있다. 이런 것들을 잘 가려서 관심 있게 들어주어야 한다.

“여보, 넥타이 어디 있어?”라고 묻는 남편의 말은 단지 넥타이의 행방을 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보, 나 좀 도와 줘!”라는 말인 것이다. 이럴 때 마음의 말을 듣는 현명한 아내라면 빨리 가서 넥타이를 찾아 주지만 그렇지 못한 아내는 “아니, 당신이 어디다 두고 그걸 물어 봐요?”라고 말한다. 남편이 이 말에 신경질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을 읽어 주어야 그때부터 깊은 대화가 시작된다. 의외로 많은 부부들이 이러한 대화를 하지 못한다. 부부 사이에도 금기가 있어서 어느 선까지만 말하고 그 이상은 진전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곧 부부 사이에 “막힌 담”이 있다는 증거이다.

“막힌 담”이 존재하는 부부는 결코 하나 되지 못한 부부이다. 이런 부부들은 性的인 관계에서도 결코 “하나 된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 마음을 다 주는 그야말로 “헌신된 하나됨”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부부들의 대화 습관은 다른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습관을 만들지만 나중에는 습관이 자신을 만들기 때문”(존 드라이든)이다.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100%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영과 영을 이어주는 대화이기보다는 항상 표피적인 인스턴트 대화만이 오고간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내뱉은 말에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또 가슴의 말을 하기가 꺼려지기 때문에 그럭저럭 웃고 지낼 수 있는 세상적인 말들만이 대화의 소재를 이루게 된다. 그 사람들에게 중보 기도란 있을 수 없다. 있다 하더라도 마음 속 깊은 곳의 기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입에서만 맴도는 “입술의 기도”가 되기 십상이다.

더불어 “입술의 말”을 주로 하는 사람은 남을 쉽게 정죄한다. 그리고 비판한다. 입술이 가볍기 때문이다. 그저 “머리의 말”만 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 지식으로 입에 거품을 무는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종류이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도 바로 그렇다. “입술의 말”, “머리의 말”로 기도를 드릴 때 그 기도는 공허해 진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도 못한다.

성경 야고보서(3:1-8)는 우리가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 생애의 모습이 결정된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자기 입에서 나온 말이 자기 자신을 망쳐 버리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의 일생을 완전히 망쳐 버리기도 한다. 자신의 가족에게도 그렇고 교회 내의 지체는 물론이요 세상 속에서의 인간관계에서도 그렇다.

특별히 부부간에 오고가는 말들 중에 생명을 파괴하는 말들이 난무함을 자주 본다. 자녀에게도 사망의 언어요 사탄의 언어를 마구 퍼붓는다. “뭐, 또 책 사 달라고?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 “꼴도 보기 싫어!”, “말 안 들으려면 차라리 나가서 살아!”, “자식이 아니라 웬수다 웬수여!”, “어떻게 그런 것은 꼭 지네 아빠 닮아 가지고...”, “아이구, 돈이 아깝다”.

“입술의 30초가 가슴의 30년이 된다”는 사실을 아는가? 순식간에 내뱉은 말이 그 말을 듣는 사람의 가슴에 깊이 박혀서 한으로 남기도 하고 울화통으로 변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말은 생명력과 운동력이 있다. 그래서 “웃느라 한 말에 초상나기도 한다”. 또 “말이 씨가 되기도 한다”. “말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우리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말은 우리를 병에서 낫게 하기도 하며, 우리를 질병에 빠지게도 한다. 말은 우리를 파괴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를 생명과 행복과 건강으로 풍성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케네스헤긴)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한다. 쓰디쓴 말 한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리고, 무례한 말 한마디가 사랑의 불을 끈다. 은혜스러운 말 한마디가 길을 평탄케 하고, 즐거운 말 한마디가 하루를 빛나게 한다.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긴장을 풀어 주고, 사랑의 말 한마디가 축복을 준다”.

내가 한 말에 대해서 창조주 앞에서 낱낱이 고해야 할 때가 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깨어진 그릇에서 쏟아진 물과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다 원상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한다.

우리 모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말을 하자. 말의 중요성을 깨닫고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지 않도록 훈련하자. 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격려, 칭찬하는 말을 많이 하도록 하자. 그리고 말의 원천인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자. 어찌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으랴 마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훈련한다면 그 날은 반드시 찾아오지 않겠는가?

추부길 목사(웰빙교회 담임목사 한국가정사역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