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오현 박사
뉴욕 신학대학 및 대학원 학장
사해사본의 연대를 어떻게 확증하느냐 하는 것은 사본의 진정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가짜 고고학 문서나 유물로 돈을 벌려는 시도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연대 문제는 서류의 내용으로 확정하는 내적 방법과 외적으로 측정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번에는 고고학적으로 외적 연대를 어떻게 측정하느냐는 문제를 소개하려고 한다.
나는 한국에서 고적이 발견되었다 하면 인부들을 동원하여 얼마만큼 가치가 있는 국보급 금관이나 보물을 캐내었다고 보도할 때에 가슴이 섬?섬? 놀래고 하였다. 나는 1973년에 성서 고고학 연구를 위하여 헤시(Tell el-Hesi)에서 실제 발굴작업을 하였다. 그 때 나의 구약교수이신 김 정준 박사는 팔레스타인에서 실제로 고고학 발굴을 한 것은 한국서람으로는 네가 처음이라고 격려편지를 보내 주었다. 발굴은 결코 삽으로 흙을 파내고 보물을 찾는 작업이 아니다. 5mX5m의 정방형 지점을 정하여 위에서부터 차례로 한 커풀 한 커풀 벗겨 내려간다. 솔과 조그마한 정원 삽으로 조심스럽게 파내려 간다. 다음 세대가 다른 방법으로 발굴하도록 다른 곳은 건드리지 않는다. 고적은 한 번 파헤치면 다시 복원할 수 없도록 파괴되기 때문에 깊이를 측정하고 어떠한 돌이라든지 무슨 고고학 유물이 나오든지 그 형태를 정확히 기록하고 또 사진을 찍는다. 사람이 살다 가면 그릇(pottery)이 깨어진 것, 도구(Flint)등 어떤 형태이든지 유물을 남기게 마련이다. 파다가 재가 있으면 불로 소멸된 것을 말하고 모래가 잔잔하게 쌓이면 홍수가 나서 물로 무너진 것을 말하며 마치 시루떡 같이 사람이 살다간 계층별로 흔적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발이 닿지 아니한 흙(virgin soil)까지 발굴하여 그곳에서 사람들의 역사를 거꾸로 재건하게 된다.
사해사본의 연대를 처음 표명한 것은 예루살렘의 미국 고고학연구소에서 연구하던 트레버(John Trever)교수이다. 성 마가 수도원의 사무엘 주교가 사해사본이 무엇이며, 그 진정성과 가치를 알아보려고 사본을 연구소에 보냈을 때에 두 폭을 복사해서 히브리 글씨체를 비교 연구할 때에 주전 2세기 부터 주전 3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나쉬(Nash Papyrus)사본보다 약간 이르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1948년 2월 19일)사해사본의 연대에 대한 제일 처음 있는 천명이다. 사해사본과 관련하여 고고학적으로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은 (1)필경체 비교연구, (2)사본을 기록한 가죽, 잉크, 두루마리를 싼 천의 분석, (3)동굴에서 발견된 항아리와 토기 조각, (4)동전들, (5)그리고 방사선 연구의 다섯가지 이다.
1.필경체의 비교연구(Paleography) : 필경체의 비교연구는 글씨 쓰는 형태, 철자(Orthography), 어형(Morphology)등을 비교 연구하여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이다. 히브리어는 고대에 서사체로 쓰다가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아람어의 네모난 글자를 채택하였다. 시대에 따라 또는 쓰는 필경사에 따라 글씨 모양이 다르므로 이를 비교한다. 철자는 한굴의 경우 아래 앗자 한 글을 썼으면 해방되기 이전의 작품인 것을 쉽게 알게 된다. 어형은 "하였느니라"등 고어체를 판별한다. 위에서 소개한대로 사해사본이 연대를 정하는데 제일 먼저 쓴 방법이 이 필경체의 비교연구이다. 필경체 연구로 성마가 수도원의 이사야서물(1QIs), 주전2세기, 교단규정(1QS)을 주전 150-100년, 하박국 주석(1QpHab)을 주전 100-50년경 등으로 측정한다.
2.두루마리를 싼 천 : 항아리 속에 들어있던 두루마리는 천으로 싸여져 있었다. 요르단 고적 유물장관 하딩이 그 천 조각을 영국에 가지고 가서 의뢰하여 팔레스타인의 고유한 것이고 고대의 것이라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정확한 연대를 측정할 수 없었다.
3.사본을 담은 항아리: 두루마리를 담은 항아리가 폭이 겨우 10인치인데 두 자 정도 높아서 두루마리를 넣기 위하여 특별히 만들지 않았나 생각하였으나 쿰란 수도원발굴에서 깨어지지 않은 온전한 것이 발견되어 그 의심은 깨끗이 사라졌다. 물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음식을 담는 일상용기였기 때문이다. 이 항아리는 헤롯 이전 헬레니스틱시대 주전 2세기나 1세기에 만들어졌다. 이들 항아리와 똑 같지는 않지만 헬레니스틱 동전들과 같이 벤 술에서도 발견되었고 애굽에서 똑 같은 항아리 두 개가 발견되었는데 투린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4.동전 : 위에서 쿰란 수도원의 발굴에서 동전이 750여 개가 나왔다고 말하였다. 동굴이나 무덤에서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안디옥크스 때(Antiochus VII Sidetes, 138-129 BC) 은전 1개
휘로카누스( John Hyrcanus T, 135-104 BC) 동전 15개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103-76 BC) 동전 86개
알렉산드라(Alexandra 76-67 BC)에서 헤롯(Herod the Great, 37BC) 동전 5개
헤롯때(Herod the Great 37-4 BC) 동전 5개
아길라오 때(Herod Archelaus 4BC-AD6) 많이
로마총독 통치기간 많이
유대의 전쟁기간 (AD 66-70) 여러 개
제 2로마 전쟁때 (AD 132-135) 12개
동전의 분포상태는 쿰란 수도원이 제 1기 주전 2세기 쿰란에서 주전 31년 지진이 나기까지 거주하다가, 제 2기는 아킬라오 때부터 유대인의 폭동까지 (4BC-AD 68)거주하고 끝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 2로마와의 전쟁은 쿰란 수도원과는 무관하다.
5.탄소-14 방사선 연구: 모든 유기체는 생명이 죽으면 탄소로 변하므로 방사선(Carbon-14)를 쪼이면 분해하는 비율에 따라 그 유기체의 생존하였던 연대를 5-10%의 오차를 두고 측정하게 된다. 천과 나무 조각과 가죽을 실험하였다. 시카고 대학교의 핵 연구소의 리비(W. F. Libby)교수는 1951년 1월 9일에 AD 33+-200, 즉 주전 168년에서 주후 233년이라고 보고하였다. 쿰란에서 발견된 종려나무 조각은 주전 7년에서 주후 18년 +-40년 즉 주전 32년에서 주후 48년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이 방사선 실험은 지금도 계속하여 거의 같은 연대를 보여준다.
사해 사본과 쿰란 수도원의 고고학적 유물은 두루마리 내용만을 가지고 중세기의 작품이라고 고집부리는 극소수의 학자를 제외하고는 주전 2세기 중엽부터 주후 1세기 초반부의 200년간에 쓰여진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팔레스타인 성지에서 현재 우리가 가진 성경보다 1000년 이른 가장 오랜 성경을 비롯하여 그들 자신이 직접 쓴 글들을 읽게 된다. 사해사본의 진정성과 고대성이 입증되었으므로 그들이 어떻게 살고, 무슨 사상을 가졌는지를 계속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뉴욕 신학대학 및 대학원 학장
사해사본의 연대를 어떻게 확증하느냐 하는 것은 사본의 진정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가짜 고고학 문서나 유물로 돈을 벌려는 시도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연대 문제는 서류의 내용으로 확정하는 내적 방법과 외적으로 측정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번에는 고고학적으로 외적 연대를 어떻게 측정하느냐는 문제를 소개하려고 한다.
나는 한국에서 고적이 발견되었다 하면 인부들을 동원하여 얼마만큼 가치가 있는 국보급 금관이나 보물을 캐내었다고 보도할 때에 가슴이 섬?섬? 놀래고 하였다. 나는 1973년에 성서 고고학 연구를 위하여 헤시(Tell el-Hesi)에서 실제 발굴작업을 하였다. 그 때 나의 구약교수이신 김 정준 박사는 팔레스타인에서 실제로 고고학 발굴을 한 것은 한국서람으로는 네가 처음이라고 격려편지를 보내 주었다. 발굴은 결코 삽으로 흙을 파내고 보물을 찾는 작업이 아니다. 5mX5m의 정방형 지점을 정하여 위에서부터 차례로 한 커풀 한 커풀 벗겨 내려간다. 솔과 조그마한 정원 삽으로 조심스럽게 파내려 간다. 다음 세대가 다른 방법으로 발굴하도록 다른 곳은 건드리지 않는다. 고적은 한 번 파헤치면 다시 복원할 수 없도록 파괴되기 때문에 깊이를 측정하고 어떠한 돌이라든지 무슨 고고학 유물이 나오든지 그 형태를 정확히 기록하고 또 사진을 찍는다. 사람이 살다 가면 그릇(pottery)이 깨어진 것, 도구(Flint)등 어떤 형태이든지 유물을 남기게 마련이다. 파다가 재가 있으면 불로 소멸된 것을 말하고 모래가 잔잔하게 쌓이면 홍수가 나서 물로 무너진 것을 말하며 마치 시루떡 같이 사람이 살다간 계층별로 흔적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발이 닿지 아니한 흙(virgin soil)까지 발굴하여 그곳에서 사람들의 역사를 거꾸로 재건하게 된다.
사해사본의 연대를 처음 표명한 것은 예루살렘의 미국 고고학연구소에서 연구하던 트레버(John Trever)교수이다. 성 마가 수도원의 사무엘 주교가 사해사본이 무엇이며, 그 진정성과 가치를 알아보려고 사본을 연구소에 보냈을 때에 두 폭을 복사해서 히브리 글씨체를 비교 연구할 때에 주전 2세기 부터 주전 3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나쉬(Nash Papyrus)사본보다 약간 이르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1948년 2월 19일)사해사본의 연대에 대한 제일 처음 있는 천명이다. 사해사본과 관련하여 고고학적으로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은 (1)필경체 비교연구, (2)사본을 기록한 가죽, 잉크, 두루마리를 싼 천의 분석, (3)동굴에서 발견된 항아리와 토기 조각, (4)동전들, (5)그리고 방사선 연구의 다섯가지 이다.
1.필경체의 비교연구(Paleography) : 필경체의 비교연구는 글씨 쓰는 형태, 철자(Orthography), 어형(Morphology)등을 비교 연구하여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이다. 히브리어는 고대에 서사체로 쓰다가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아람어의 네모난 글자를 채택하였다. 시대에 따라 또는 쓰는 필경사에 따라 글씨 모양이 다르므로 이를 비교한다. 철자는 한굴의 경우 아래 앗자 한 글을 썼으면 해방되기 이전의 작품인 것을 쉽게 알게 된다. 어형은 "하였느니라"등 고어체를 판별한다. 위에서 소개한대로 사해사본이 연대를 정하는데 제일 먼저 쓴 방법이 이 필경체의 비교연구이다. 필경체 연구로 성마가 수도원의 이사야서물(1QIs), 주전2세기, 교단규정(1QS)을 주전 150-100년, 하박국 주석(1QpHab)을 주전 100-50년경 등으로 측정한다.
2.두루마리를 싼 천 : 항아리 속에 들어있던 두루마리는 천으로 싸여져 있었다. 요르단 고적 유물장관 하딩이 그 천 조각을 영국에 가지고 가서 의뢰하여 팔레스타인의 고유한 것이고 고대의 것이라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정확한 연대를 측정할 수 없었다.
3.사본을 담은 항아리: 두루마리를 담은 항아리가 폭이 겨우 10인치인데 두 자 정도 높아서 두루마리를 넣기 위하여 특별히 만들지 않았나 생각하였으나 쿰란 수도원발굴에서 깨어지지 않은 온전한 것이 발견되어 그 의심은 깨끗이 사라졌다. 물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음식을 담는 일상용기였기 때문이다. 이 항아리는 헤롯 이전 헬레니스틱시대 주전 2세기나 1세기에 만들어졌다. 이들 항아리와 똑 같지는 않지만 헬레니스틱 동전들과 같이 벤 술에서도 발견되었고 애굽에서 똑 같은 항아리 두 개가 발견되었는데 투린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4.동전 : 위에서 쿰란 수도원의 발굴에서 동전이 750여 개가 나왔다고 말하였다. 동굴이나 무덤에서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안디옥크스 때(Antiochus VII Sidetes, 138-129 BC) 은전 1개
휘로카누스( John Hyrcanus T, 135-104 BC) 동전 15개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103-76 BC) 동전 86개
알렉산드라(Alexandra 76-67 BC)에서 헤롯(Herod the Great, 37BC) 동전 5개
헤롯때(Herod the Great 37-4 BC) 동전 5개
아길라오 때(Herod Archelaus 4BC-AD6) 많이
로마총독 통치기간 많이
유대의 전쟁기간 (AD 66-70) 여러 개
제 2로마 전쟁때 (AD 132-135) 12개
동전의 분포상태는 쿰란 수도원이 제 1기 주전 2세기 쿰란에서 주전 31년 지진이 나기까지 거주하다가, 제 2기는 아킬라오 때부터 유대인의 폭동까지 (4BC-AD 68)거주하고 끝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 2로마와의 전쟁은 쿰란 수도원과는 무관하다.
5.탄소-14 방사선 연구: 모든 유기체는 생명이 죽으면 탄소로 변하므로 방사선(Carbon-14)를 쪼이면 분해하는 비율에 따라 그 유기체의 생존하였던 연대를 5-10%의 오차를 두고 측정하게 된다. 천과 나무 조각과 가죽을 실험하였다. 시카고 대학교의 핵 연구소의 리비(W. F. Libby)교수는 1951년 1월 9일에 AD 33+-200, 즉 주전 168년에서 주후 233년이라고 보고하였다. 쿰란에서 발견된 종려나무 조각은 주전 7년에서 주후 18년 +-40년 즉 주전 32년에서 주후 48년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이 방사선 실험은 지금도 계속하여 거의 같은 연대를 보여준다.
사해 사본과 쿰란 수도원의 고고학적 유물은 두루마리 내용만을 가지고 중세기의 작품이라고 고집부리는 극소수의 학자를 제외하고는 주전 2세기 중엽부터 주후 1세기 초반부의 200년간에 쓰여진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팔레스타인 성지에서 현재 우리가 가진 성경보다 1000년 이른 가장 오랜 성경을 비롯하여 그들 자신이 직접 쓴 글들을 읽게 된다. 사해사본의 진정성과 고대성이 입증되었으므로 그들이 어떻게 살고, 무슨 사상을 가졌는지를 계속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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