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고속도로상에서 주행중에 발생했다하니 경미한 접촉사고의 범위는 한참 벗어난 모양이다. 혼자서 이개국을 넘나들며 사역하느라 동분서주하다가 엉겁결에 당한 생애 최대의 대형사고라고 한다. 전선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음성이 퍽이나 착잡하다. 납덩이를 매단듯 무겁게 가라앉은 것이 사고의 크기를 가늠하게 한다. 사고 직후 그의 생각은 분명, 피붙이 하나 없는 이국땅에서 최악의 사태라도 발생했다면 하는 데까지 달음질쳤을 것이다. 그리곤 현깃증이 나도록 아찔해 했을 것이다. 지금 그의 심정은 부서지고 구겨진 자동차처럼 처참하리라.
떨어져 있는 가족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보니 사고가 더 커졌다며 말꼬리를 흐리는 그에게서 진도 7은 족히 넘을 것 같은 심적 동요가 전해온다. 더 허물어져 내리기 전에 수습해야 하리란 위기감이 팽배해진다. 타칭, 무대뽀 불도저로 강인함의 상징인 그가 유독 아내인 내게만 이따금씩 내보이는 심약함이 싫어서 위로해 주기는 커녕 나는 버럭 화를 내고만다. 나 또한 큰애를 혼자 두고 가야하는 섭섭함으로 눈물깨나 짜고있는 판인데. 그가 전화를 뚝 끊는다. 어둠 속에서 꼭 잡고 있던 손과 손이 풀려진 듯한 단절감이 아득하게 밀려온다.
당장 오라고 억지를 부리는 남편이 먼저 선교지로 돌아간 건 겨우 한달 반 전. 일년을 예정했던 안식년 기간이 줄고줄어 석달 반이라도 된 건 둘째 아이의 한국어 습득을 위해서이다. 그나마 한 학기조차도 다 채우지 못하고 조기 출국을 서두르게 된 것도 남편의 채근 탓인데, 결국 한 보름을 앞두고 덜컥 사고가 나버린 것이다.
차는 부서져도 사람은 무사한 걸 알았으니 나는 그의 넋두리에 동승하지 않고자 다짐하는 매정한 아내가 되기로 한다. 법적인 해결까지 사고의 여파가 수그러들려면 어림잡아도 한달은 족히 골머리깨나 앓아야 한다. 남편 스스로 져야할 짐이지만 휘청거릴 때 받쳐줄 지팡이같은 아내가 없으니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을게다.
오랜 세월 외딴 선교지에서 살아온 우리 부부는 어느 새 생각이 같아 버린 자웅동체(雌雄同體)가 되었다. 서로를 위한 당근과 채찍의 타이밍이 기계처럼 적확하다. 반나절쯤 지나자 예측대로 남편이 다시 전화를 걸어온다. 마침 집에 있던 두 아들과도 통화를 한다. 아까의 어이없는 투정이 미안해서 억지로 변조한 밝은 음성임을 나는 눈치챈다.
'아이! 아빠 그러니 항상 조심하셔야죠.' 이건 늘 그렇듯 친구같은 큰 아들의 애정어린 질타다. 나를 놀라게 한 건, 아빠 때문에 제 평생 별러온 눈 구경도 못하고 선교지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투덜거리던 열 살난 둘째의 능큼스러움이다. '아빠,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이제 며칠 안 있으면 우리가 갈 거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요. 아빠, 힘내세요.'라며 정을 듬뿍 묻힌 목소리가 몰랑몰랑한 찰떡이다.
'그래, 내가 희생해서 우리 가족이 다들 좋으면 됐지.'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한결 경쾌하다. 생기가 넘친다
박순옥 선교사
떨어져 있는 가족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보니 사고가 더 커졌다며 말꼬리를 흐리는 그에게서 진도 7은 족히 넘을 것 같은 심적 동요가 전해온다. 더 허물어져 내리기 전에 수습해야 하리란 위기감이 팽배해진다. 타칭, 무대뽀 불도저로 강인함의 상징인 그가 유독 아내인 내게만 이따금씩 내보이는 심약함이 싫어서 위로해 주기는 커녕 나는 버럭 화를 내고만다. 나 또한 큰애를 혼자 두고 가야하는 섭섭함으로 눈물깨나 짜고있는 판인데. 그가 전화를 뚝 끊는다. 어둠 속에서 꼭 잡고 있던 손과 손이 풀려진 듯한 단절감이 아득하게 밀려온다.
당장 오라고 억지를 부리는 남편이 먼저 선교지로 돌아간 건 겨우 한달 반 전. 일년을 예정했던 안식년 기간이 줄고줄어 석달 반이라도 된 건 둘째 아이의 한국어 습득을 위해서이다. 그나마 한 학기조차도 다 채우지 못하고 조기 출국을 서두르게 된 것도 남편의 채근 탓인데, 결국 한 보름을 앞두고 덜컥 사고가 나버린 것이다.
차는 부서져도 사람은 무사한 걸 알았으니 나는 그의 넋두리에 동승하지 않고자 다짐하는 매정한 아내가 되기로 한다. 법적인 해결까지 사고의 여파가 수그러들려면 어림잡아도 한달은 족히 골머리깨나 앓아야 한다. 남편 스스로 져야할 짐이지만 휘청거릴 때 받쳐줄 지팡이같은 아내가 없으니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을게다.
오랜 세월 외딴 선교지에서 살아온 우리 부부는 어느 새 생각이 같아 버린 자웅동체(雌雄同體)가 되었다. 서로를 위한 당근과 채찍의 타이밍이 기계처럼 적확하다. 반나절쯤 지나자 예측대로 남편이 다시 전화를 걸어온다. 마침 집에 있던 두 아들과도 통화를 한다. 아까의 어이없는 투정이 미안해서 억지로 변조한 밝은 음성임을 나는 눈치챈다.
'아이! 아빠 그러니 항상 조심하셔야죠.' 이건 늘 그렇듯 친구같은 큰 아들의 애정어린 질타다. 나를 놀라게 한 건, 아빠 때문에 제 평생 별러온 눈 구경도 못하고 선교지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투덜거리던 열 살난 둘째의 능큼스러움이다. '아빠,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이제 며칠 안 있으면 우리가 갈 거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요. 아빠, 힘내세요.'라며 정을 듬뿍 묻힌 목소리가 몰랑몰랑한 찰떡이다.
'그래, 내가 희생해서 우리 가족이 다들 좋으면 됐지.'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한결 경쾌하다. 생기가 넘친다
박순옥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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