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겨울의 추위가 도시의 이 편과 저 편에서 몰려오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사람들의 옷이 점점 두터워지고 움츠린 몸과 움츠린 마음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가로수들이 마지막 남은 이파리들마저 떠나보내자 거리는 더욱 싸늘해지고 있다.
추위에 떠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따뜻한 곳을 찾고 싶어 한다. 또한 시린 손을 잡아줄 그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된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두터운 겨울 외투가 우리의 삶 속에 침투하는 근원적이 추위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견고한 보호막이 될 것이라 여기는 모든 것들이 완전한 것들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몹시 추위를 탔다. 인생의 추위를 일찍이 맛보았고 너무 추워서 얼어죽을 것만 같은 유년기를 보냈다. 그때 이미 나이가 많으신 내 아버지는 어린 딸이 가여웠는지 겨울이면 옷장에 있는 낡은 옷들까지 죄다 꺼내서 입히시곤 했다. 아마도 내 기억에는 내복과 외투를 포함해서 평균 열 벌 정도의 옷을 껴입고 뒤뚱거리며 다녔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라도 세상의 혹한으로부터 어린 딸을 보호하려고 하셨던 것일까.
그런 아버지의 사랑은 오히려 나를 더 추위를 타는 체질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추위를 이기려면 많이 껴입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볍게 입히고 추위에 적응하는 강한 체질로 만드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었다.
아무리 옷을 많이 껴입어도 내 몸은 늘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두 손은 발갛게 얼어있었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오는 생의 추위가 나를 온통 지배하고 있을 때 나는 추운 계절 속에 오랫동안 갇혀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나를 그곳에서 꺼내줄 구원자가 필요했다. 언 손을 따뜻하게 녹여줄 누군가의 손이 필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추위는 싫었지만 겨울은 좋았다. 내 마음 속 같은 삭막한 겨울 산이나 황량한 겨울 들판이나 나뭇잎 하나 품지 못하고 떠나보낸 겨울나무들을 보며 역설적인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경상도의 그 지방은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엔 몹시 추운 지방이었다. 겨울이 되어도 지역의 특성상 눈이 많이 내리지 않는 곳이었지만 어쩌다 눈이 내린 겨울 아침이면 온 세상이 내 것이 된 것처럼 기뻐했다. 모든 슬픔과 고통이 눈 속에 묻혀버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잠시 눈 속에 묻혀버린 것들은 곧 녹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속의 모든 것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슬픔과 고통은 유년기를 지나올 동안 그림자처럼 따라붙었고 절망의 그늘 속에서 늘 울고 있었지만 한 가닥 희망은 햇살처럼 내 곁에 따라다녔다.
혹한의 겨울에도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기적이 일어났다. 내 언 손을 잡는 따스한 손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손은 점점 더 다가와 나의 얼어붙은 마음까지도 녹이고 있었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어느 순간 그 놀라운 능력의 따스한 손길은 나의 오래된 생의 추위를 거두어 가셨던 것이다.
깊은 치유의 시간이 꿈결처럼 흐른 후 나는 사역자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헨리나우웬은 <상처입은 치유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상처는 다른 사람의 치유를 위한 강력한 자원이 된다’ 고. 치유가 필요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똑같은 종류의 아픔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진정으로 그의 아픔에 공감하며 다가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식을 먼저 여읜 사람의 아픔을 진정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사람이듯이...
우리는 이제 많은 아픔과 상처의 흔적을 가진 것을 부끄럽게 여길 필요가 없다. 내면의 깊은 치유를 경험하기만 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치유자로 세워질 수 있다. 상처없이 살아온 사람이 있을까. 상처를 치유받지 못한 채 마치 딱지 밑에 고름이 가득 고여있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듯이, 내색하지 않고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처의 경험을 그대로 투사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더군다나 치유받지 않은 사역자는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때로는 죽이기까지 하게 된다. 이것은 무서운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치 상처받은 적이 없는 것처럼 혹은 상처가 다 치유받은 것처럼 자신을 포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찌꺼기들이 물 밑으로 가라앉아 있어서 맑은 물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잠깐동안 더럽고 혼란스러워 보이더라도 문제들을 물 위로 올라오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걷어내야 한다.
딱지 밑에서 아물지 않은 상처는 드러내고 고름을 짜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아무리 나이가 많아진다 해도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해결은 커녕 그 상처들은 더욱 깊어져서 건강한 다른 곳까지 번져나가 온 영혼을 병들게하고 말 것이다. 온전한 치유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치유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자신의 모든 상처를 맡겨야 한다. 상처를 온전히 치유 받으면 우리는 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다.
추위가 온 거리를 휩쓸고 있다. 마음까지 추운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이제 언 손을 내밀어서 그 따스한 손을 잡아야할 때이다. 따스한 손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내밀어져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 이 손을 잡으라. 울고 있을 때마다 다가와 조용히 등 두드리시며 위로하시는 주님의 손을 느껴보라.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한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는다. 이제 주님의 따스한 손을 속히 잡으라!
세상이 주는 강력한 추위로부터 날카로운 베임을 당했는가? 하늘의 따스함으로 가득한 주님의 치유의 손길을 받아들여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하여 혹독한 댓가를 지불하셨다. 그분이 내민 손을 우리는 잡기만 하면 된다.
이 추위는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이다. 세상에 사는 동안 두터운 외투를 아무리 많이 껴입어도 추위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오직 주님의 손을 잡기 전까지는...!
추위에 떠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따뜻한 곳을 찾고 싶어 한다. 또한 시린 손을 잡아줄 그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된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두터운 겨울 외투가 우리의 삶 속에 침투하는 근원적이 추위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견고한 보호막이 될 것이라 여기는 모든 것들이 완전한 것들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몹시 추위를 탔다. 인생의 추위를 일찍이 맛보았고 너무 추워서 얼어죽을 것만 같은 유년기를 보냈다. 그때 이미 나이가 많으신 내 아버지는 어린 딸이 가여웠는지 겨울이면 옷장에 있는 낡은 옷들까지 죄다 꺼내서 입히시곤 했다. 아마도 내 기억에는 내복과 외투를 포함해서 평균 열 벌 정도의 옷을 껴입고 뒤뚱거리며 다녔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라도 세상의 혹한으로부터 어린 딸을 보호하려고 하셨던 것일까.
그런 아버지의 사랑은 오히려 나를 더 추위를 타는 체질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추위를 이기려면 많이 껴입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볍게 입히고 추위에 적응하는 강한 체질로 만드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었다.
아무리 옷을 많이 껴입어도 내 몸은 늘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두 손은 발갛게 얼어있었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오는 생의 추위가 나를 온통 지배하고 있을 때 나는 추운 계절 속에 오랫동안 갇혀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나를 그곳에서 꺼내줄 구원자가 필요했다. 언 손을 따뜻하게 녹여줄 누군가의 손이 필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추위는 싫었지만 겨울은 좋았다. 내 마음 속 같은 삭막한 겨울 산이나 황량한 겨울 들판이나 나뭇잎 하나 품지 못하고 떠나보낸 겨울나무들을 보며 역설적인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경상도의 그 지방은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엔 몹시 추운 지방이었다. 겨울이 되어도 지역의 특성상 눈이 많이 내리지 않는 곳이었지만 어쩌다 눈이 내린 겨울 아침이면 온 세상이 내 것이 된 것처럼 기뻐했다. 모든 슬픔과 고통이 눈 속에 묻혀버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잠시 눈 속에 묻혀버린 것들은 곧 녹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속의 모든 것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슬픔과 고통은 유년기를 지나올 동안 그림자처럼 따라붙었고 절망의 그늘 속에서 늘 울고 있었지만 한 가닥 희망은 햇살처럼 내 곁에 따라다녔다.
혹한의 겨울에도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기적이 일어났다. 내 언 손을 잡는 따스한 손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손은 점점 더 다가와 나의 얼어붙은 마음까지도 녹이고 있었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어느 순간 그 놀라운 능력의 따스한 손길은 나의 오래된 생의 추위를 거두어 가셨던 것이다.
깊은 치유의 시간이 꿈결처럼 흐른 후 나는 사역자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헨리나우웬은 <상처입은 치유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상처는 다른 사람의 치유를 위한 강력한 자원이 된다’ 고. 치유가 필요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똑같은 종류의 아픔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진정으로 그의 아픔에 공감하며 다가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식을 먼저 여읜 사람의 아픔을 진정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사람이듯이...
우리는 이제 많은 아픔과 상처의 흔적을 가진 것을 부끄럽게 여길 필요가 없다. 내면의 깊은 치유를 경험하기만 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치유자로 세워질 수 있다. 상처없이 살아온 사람이 있을까. 상처를 치유받지 못한 채 마치 딱지 밑에 고름이 가득 고여있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듯이, 내색하지 않고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처의 경험을 그대로 투사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더군다나 치유받지 않은 사역자는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때로는 죽이기까지 하게 된다. 이것은 무서운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치 상처받은 적이 없는 것처럼 혹은 상처가 다 치유받은 것처럼 자신을 포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찌꺼기들이 물 밑으로 가라앉아 있어서 맑은 물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잠깐동안 더럽고 혼란스러워 보이더라도 문제들을 물 위로 올라오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걷어내야 한다.
딱지 밑에서 아물지 않은 상처는 드러내고 고름을 짜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아무리 나이가 많아진다 해도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해결은 커녕 그 상처들은 더욱 깊어져서 건강한 다른 곳까지 번져나가 온 영혼을 병들게하고 말 것이다. 온전한 치유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치유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자신의 모든 상처를 맡겨야 한다. 상처를 온전히 치유 받으면 우리는 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다.
추위가 온 거리를 휩쓸고 있다. 마음까지 추운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이제 언 손을 내밀어서 그 따스한 손을 잡아야할 때이다. 따스한 손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내밀어져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 이 손을 잡으라. 울고 있을 때마다 다가와 조용히 등 두드리시며 위로하시는 주님의 손을 느껴보라.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한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는다. 이제 주님의 따스한 손을 속히 잡으라!
세상이 주는 강력한 추위로부터 날카로운 베임을 당했는가? 하늘의 따스함으로 가득한 주님의 치유의 손길을 받아들여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하여 혹독한 댓가를 지불하셨다. 그분이 내민 손을 우리는 잡기만 하면 된다.
이 추위는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이다. 세상에 사는 동안 두터운 외투를 아무리 많이 껴입어도 추위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오직 주님의 손을 잡기 전까지는...!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