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그들의 민족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바로 '기다림' 이었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그것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역사의 시작이었으며 전부였습니다.

한 개인이나 한 민족의 역사도 본래는 어떤 '기다림'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것이 습관이 되고 그것이 의식 구조로 형성이 됩니다. 야곱이 12 아들을 불러놓고 축복하는 창세기 49장의 말씀 중에 나타난 '실로가 오시기까지'(창 49:8-12) 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인 그들 가정의 의식 구조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며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예언입니다. 󰡐실로󰡑는 히브리말로 󰡐평화󰡑 󰡐안식󰡑 이라는 말입니다.

야곱의 생애도 그랬고 그들의 민족적인 역사도 그랬습니다.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족속들이었기 때문에 늘 안정되고 평화로운 생활을 갈구해 왔습니다. 자기나라와 자기 땅이 없으니 안정과 평화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쫓겨다녀야 했으며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광야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언젠가는 실로가 올 것이며, 그 실로가 오시기까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주실 것이다' 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기다림'은 곧 신앙으로 그들의 민족성 속에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나 '기다림'에는 '막연함'이나 '짐작함'이 있습니다. 가슴만 부풀어 올랐지 손에 잡히는 것이 없는 것이 바로 '기다림'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막상 진짜 '기다림'의 실체가 나타날 때도 사람들은 그것을 잡지 못하고 지나쳐 버릴 때가 많습니다.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그것을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보면 실로 '실로'에 대한 기다림만 있었지 그 실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나름대로 그 실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림은 초조하고 지루함을 가져옵니다. 그러니 때문에 사람들은 '실로'가 오기 전에 때로는 실망하고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 실체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 '실로'가 이 땅에 왔을 때는 그것을 받아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실로'가 구체적으로 현현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대부분은 바로 '기다림'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모습이 없는 막연함이 대부분입니다. 막연함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상한 형태의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로'의 실체는 예수님이 오시면 분명해집니다. 신앙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신 것같이 우리의 신앙도 분명하고 우리의 구원도 분명하고 우리의 기도의 응답도 분명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계절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심으로 우리 인생들에 있어 막연한 것이나 희미한 모든 것에 대해서 확실함을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해답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개인이나 역사 속에 예수님께서 ‘실로’로 오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