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대는 편 가르기가 유행입니다. 진보냐, 보수냐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세상입니다. 그것도 진보는 ‘선’이고 보수는 ‘악’이라는 전제를 미리 해 놓고 선택하라고 하니, 멋 모르고 ‘보수’라고 했다가는 ‘수구 꼴통’이요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대상 정도로 여기게 되다 보니까 아예 쥐 죽은 듯이 입을 다물고 살아야 그나마 생존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른 바 진보 측 인사들이 지목한 보수 신문을 보는 것만 해도 나라에 반역하는 사람 취급 당하는 판이니까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진리가 무엇인가는 지금 세대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보입니다. 그저 시대의 흐름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조류가 마음에 안들면 아예 입을 다물든지, 아니면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나팔을 부는 것이 그 사람의 인기나 명맥을 유지하는 현명한 방법이 될 듯 합니다.

저도 소시민이다 보니까 이런 말을 해야 하나 하고 망설여질 때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가 무엇이냐 인데 앞서도 말한 바 있지만 요즘은 진리 그 자체 보다는 자신들의 사상과 맞지 않으면 인터넷에 이름을 도배하고 난도질을 시켜 버리니 망설여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리는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영원토록 변치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가끔이라도 당당하게 시대의 조류에 맞서서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에 대해 설파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이 글을 쓰도록 만든 분이 평소 제가 존경하는 분이기에 사실 더욱 그러했습니다. 하여 몇 번을 망설이다가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소심한 저를 나무라지만 마시고 아량으로 받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요즘 이른바 페미니즘이 시대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남성 위주의 가치관이나 보수적인 이야기를 했다가는 큰 코 다치기 쉬운 세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이 시대의 대세와는 상당히 다른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거스르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더라도 자신의 의견과 합치하지 않으면 그냥 무시해 버린다든지, 아니면 자신의 해석을 막 붙여 가지고 본래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몰고 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

흔히 하나님의 말씀을 변형시키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가 성경의 가르침에 자신의 입장에서 뭔가를 덧붙이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성경에서 무엇인가를 제하는 방법입니다. 전자는 해석상의 문제이고 두 번째는 성경 편집의 문제를 거론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문서설 사상인데, 이는 그야말로 아주 위험한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해석을 하기 시작한다면 성경은 아주 누더기가 되고야 말 것입니다.

지난 7월, 김세윤 교수는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이라는 강좌에서 ‘여자여 잠잠하라’는 구절은 고린도전서 14장 34절과 35절을 사본학적으로, 또 바울의 남녀관계에 대한 가르침의 전체적 맥락에서 볼 때 바울이 쓴 말이 아니고 후대에 쓰여진 현재의 성경에 불안하게 삽입된 것이 확실하다고 말씀한 바 있습니다.

그러면서 “고린도전서 14장은 바울이 교회에서 예언하고 방언하는 것에 관한 가르침을 주는 주장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생활에서 남자의 독점적 리더십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이 이 구절을 디모데전서 2장 11-15절과 함께 계속 바울의 진짜 가르침으로 보고 금과옥조로 삼기를 원한다면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만들어내게 된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언론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교수는 또 “바울은 남녀 관계에 있어서 일관되게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나오는 동등성의 원칙에 따라 가르치고 있다”면서 “만약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34절과 35절을 썼다면 바울은 한 편지 안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가르침을 주는 종잡을 수 없는 사도가 되는 셈이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거기에다가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구절도 신학적인 논리라기 보다는 여자들의 복장을 단정하게 하는 교훈을 강화시키기 위한 임시적인 논리(ad hoc argument)라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또, ”고린도 전서 7장 12절-16절의 남녀 동등성에 대한 바울의 철저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또 에베소서 5장 21절의 피차 복종하라는 원칙적인 천명과 25절의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의 의무에 대한 훨씬 큰 강조는 무시한 채, 에베소서 5장 22절의 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을 가장 중요한 요구같이 주장하면 그것이 과연 옳은 해석입니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가정사역자로서 철저하게 아내와 함께 동역하면서 여성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동등성을 주장하는 사역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부부 상담을 하면서 결국 많은 부부들의 심각한 문제는 근원을 따져 놓고 보면 성경의 진리를 벗어나서 마음대로 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선 제가 남성우월주의자도 아니고, 흔히 말하는 가부장적 보수주의자도 아니라는 것을 밝힙니다.

저는 김 교수의 강의 내용을 반박하기에 앞서 먼저 성경 전반에 흐르는 남녀의 역할이나 관계성에 대해 개괄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결혼제도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동반자적 관계를 허락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한마디로 동반자적 언약(The Covenant of Companionship)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동반자적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역할은 분명히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 말씀은 곧 창조질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창조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곧 남자와 여자는 당연히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지향점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도움을 필요로 했고, 여자는 도와줄 대상이 필요로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해석하자면 남편은 일을 수행하는 쪽에 방향이 맞춰져 있으며, 여자는 돕는 쪽으로 방향이 맞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관점 중의 하나는 남자가 가정의 머리냐 하는 점입니다. 문제가 되는 구절이 바로 고린도전서 11장 3절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같은 내용이 에베소서 5장 22절로부터 24절에 나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성경은 일관되게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된다’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머리됨의 의미를 아내를 자신의 종같이, 하인같이 여기라는 뜻은 분명히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아마도 머리됨에 대해 화를 내고 성경의 오류를 지적하는 분이 있다면 그 사람은 머리됨의 진정한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부분, 곧 단어 자체만을 보기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그 머리됨의 자리는 참으로 신성하면서도 막중한 책임이 있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었음에도 하나님은 하와의 잘못을 문책하시지 않고 아담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아내의 머리된 자가 남편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편이라는 리더십은 가족 구성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이 머리됨이 독재라든지 지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이미 밝힌바와 같습니다. 오히려 머리됨은 섬기는 것(Serving)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본대로 남편들도 아내에게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자신을 주려 이 땅에 오셨지만 세상적인 개념의 머리됨은 피지배자에 대한 지배를 뜻하는 것으로 이방인 지도자들은 오히려 지배하고 권세를 누리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고야 말았습니다.

남편의 머리됨도 역시 섬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남편이 속한 가정이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존 번연(John Bunyan)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들에게 진실로 믿음이 충만한 남편이 되십시오. 그리하면 부인들은 ‘나의 남편은 단순한 육체적 남편만이 아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우리 가정의 영적인 지도자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존 번연의 이러한 말은 가정의 모든 관계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부부관계가 먼저 바로서야 되며, 그 열쇠는 남편이 부인을 대하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곧 머리됨의 위치를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에서 원형을 찾는다면 우리가 쉽게 갖게 되는 그 오해들을 풀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머리됨의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더글라스 윌슨(Douglas Wilson)은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엡 5:23)라는 이 구절은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라(ought to, 명령문)”고 가르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다(is. 평서문, 사물에 대한 진실을 설명해 주는 문장)'라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은 결혼생활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ought)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23절 이하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는 결혼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해(is) 서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결혼을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된다는 차원에서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남자의 머리됨이 없이 결혼이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곧,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주셨지만 남편에게 아내의 머리가 되라고 명령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편은 이미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결혼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을 때, 그는 형편없는 머리일지는 몰라도 여전히 아내의 머리라는 사실은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설계라는 것입니다.

저도 상담을 하다보면 그러한 남편의 머리됨의 질서가 무너졌을 때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흔들리고 역기능을 갖게 되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지게 되면 단지 아버지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런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학교에 가면 선생님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그들은 사회의 법 질서 같은 권위도 인정하지 않으려 듭니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권위마저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을 갖는다 할지라도 자기 위주의 이기적인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가정사역을 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내의 질서를 요구하시는 가에 대해 많은 묵상을 해 왔습니다. 성경은 김 교수가 말한 대로 분명히 남녀가 동등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게 창조되었고 동등한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질서는 있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일한 하나님이시지만 그 가운데서도 질서가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간은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이기는 하지만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온전하게 굴러갑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의견을 다 받아 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인 결정이나 대표는 남편이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남자가 여자보다 질적으로나 영적으로 우수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상담하다보면 정말 아내보다 못한 남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내가 자신보다 부족한 남편을 머리된 자로 섬기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게 되면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가 깨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 Jr.)도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궁극적으로 그 분께 대한 복종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남편에게 복종하는 아내는 곧 주님께 복종하는 것과 같다. ... 아내가 남편의 지시에 적합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역기능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기꺼이 사랑으로 반응하는 아내는 하나님과 가정과 교회에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한다. 아울러 세상 앞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아름다운 본보기가 된다.”(Different by Design)

저는 여성의 목사 안수에 대해 거론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아주 걱정스러운 것 중의 하나가 아내가 목사이고 남편이 평신도였을 때 그 가정의 머리됨이 어떻게 될까에 대한 것입니다. 지난 번 어느 여 목사가 자랑스럽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집에 가서 남편이 뭐라고 화를 내고 그러면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감히 집사가 목사한테 대들어?”

제가 이렇게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밖에서는 목사요, 집사이지만 집에 들어오면 그때부터는 남편과 아내의 질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가게 되면 그 아내에 대해 축복권을 행사해야 될 남편으로, 가장의 질서로 돌아가야 그 가정이 올바르게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게 되면 그러한 가정은 틀림없이 역기능의 가정이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문제의 가정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 성경의 질서에 대해 의심이 간다면 직접 그런 상담 사례들을 살펴보십시오. 결국은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할 때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관점에서 더불어 살펴 봐야 할 것은 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창조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만약 아담을 지어 놓고 나니까 “아, 실수했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야말로 문제가 있는 해석입니다. 여자가 나중에 창조된 것도 가정 안에서의 권위와 질서를 세우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이미 언급한 바 있던 고린도전서 11장 8-9절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아담이 하와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은 권위자만이 갖는 특성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마도 페미니즘 학자들은 그러한 접근 자체가 문제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즉, 아담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고 주장하기도 하며,예수님도 페미니스트이고, 여성에 관한 참된 역사가 성경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제외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더 이상 논쟁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에서 사람으로 번역된 ‘아담(Adam)'이라는 단어를 눈여겨 본다면 가정에서의 질서가 무엇인지 금방 알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복을 주신 후에 그들을 ’아담‘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곧 하와는 처음부터 남편의 이름으로 언약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에서 결혼하게 되면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은 지극히 기독교적 발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의 레이먼드 오클랜드 교수는 남녀의 역설적인 관계를 이렇게 명쾌하게 정의합니다.

“하와가 아담과 동등했던가? 대답은 그렇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 하와는 아담과 영적인 면에서 동등하고 그에게 적합한 존재였지만 그녀는 아담을 돕는 자였다는 점에서 그와 동등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여 지으셨고, 그렇게 창조된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은 각각 그 역할이 달랐다. 남자는 그 남성다움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위한 지도자적 역할을 맡게 되었고, 여자는 그 여성다움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위한 조력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Male-Female Equality and Headship)

김세윤 교수가 말했던 “여자여 잠잠하라”나 “머리됨”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설명이 되었겠지만 다시한번 정리를 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한마디로 “여자여 잠잠하라”는 그 말씀이 갑자기 불쑥 튀어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후대에 쓰여진 현재의 성경에 불안하게 삽입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성경, 특별히 바울 사도도 일관되게 남자와 여자의 질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질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남편이 있고, 그 남편을 머리로 하여 아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도 그렇지만 요즘도 보면 신앙이 특심이다 보니 방언의 은사나 예언의 은사를 아무래도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더 많이 받게 되는 듯 싶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은사를 받은 많은 여자 성도들이 남자들을 무시하고 앞에 서서 떠들어 대고 그릇된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여자들을 가리켜 “잠잠하고 질서를 지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질서관은 고린도전서 14장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질서를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이미 언급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서술하지 않겠지만 만약 “여자여 잠잠하라”나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에 대해 후대에 추가되었다거나 잘못된 성경 해석으로 몰아 붙인다면 그것은 성경의 전반적인 흐름 자체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김세윤 교수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 말씀을 빗대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하나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여기에 대한 로버트 소시(Robert L. Saucy)박사의 대답은 분명한 답을 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어떤 차이가 극복되었느냐 하는 것이 해석학의 관건이다. 이 문제를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는 사도의 말에 비추어 다시 물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남성과 여성이 함께 공유하는 그 ‘하나됨’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된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기능상의 질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혀 두고 싶다. 오히려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인 지위에 관계된 것이다. ... 이 구절에 인간 사회의 기능적인 질서에 관한 문제를 부과하려는 것은 문맥에 입각한 정당한 해석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의미를 억지로 집어 넣는 것이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3장 28절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놓인 기능적인 질서를 폐지할 수도 없고. 믿는 부모와 자녀, 또는 믿는 시민과 통치자 사이에 놓인 기능적인 질서를 폐지할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신자들이 교회라는 조직 안에서나 밖에서나 그리스도 안에서나 밖에서나 모두 하나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Perspectives on Evangelical Theology)

이 세대는 남녀 평등을 주장하고 페미니즘적 사상이 시대의 ‘선’이라고 몰아 붙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남녀가 평등하되 질서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질서 자체를 무시한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의 창조 질서 자체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저는 현장에서 사역을 하는 사람으로서 질서가 무너진 가정의 폐해를 수없이 보아 왔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목회자 세미나나 사역자들에게 수없이 당부합니다. 질서를 세워달라고 말입니다. 가정에서의 질서, 남편과 아내의 질서, 부모와 자녀간의 질서... 그 질서가 가정의 기본이요, 사회 질서의 기초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신앙의 기초가 되기도 합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나라를 훈련하는 장소입니다. 가정에서 질서를 훈련받지 못한 사람들이 그 어디 가서 질서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혼돈의 세상입니다. 질서가 무너지는 세상입니다. 회사의 고용주와 노동자가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며 회사의 운영에 노조가 개입하겠다고 나서는 세상입니다. 학교의 운영에 학생들이 직접 개입하겠다고 나서는 세상입니다. 심지어 교회에 노조가 생겨나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교회에서까지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리려 한다면 이 사회가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사회의 기초단위인 가정의 질서를 무너뜨린다면 이 세상이 과연 어떻게 흘러 가겠습니까?

혹시 남편과 아내의 질서에 대해 실제적인 사례를 깊이 보시고자 한다면 로라 데일(Laura Dayle)이 쓴 ‘여자여 항복하라(The Surrendered Wife)’는 책을 꼭 한 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 책을 보게 되면 남자와 여자의 질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피부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라는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존 칼빈(John Calvin)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겸손해지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머리에 너무 많이 의존하지 않도록 합시다. ... 하나님께서 우리들로부터 영광 받으시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사이에 분명하게 확립된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 또한 교회의 아무 것도 변형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Men, Women, and Order in the Church)

하기야 바람피우고 이혼하고서도 뻔뻔하게 “이혼한 사람도 목회만 잘 하더라”고 큰 소리 치면서 또다시 목회를 하는 목사들도 많은 세상이니 ‘여자여 잠잠하라’는 말씀이 편집되었느니 마니 하는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으리요마는 가정사역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참으로 걱정이 됩니다. 제발 교회의 지도자들이 성도들의 방향을 잘 잡아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 안해도 복잡하고 정신없는 세상인데 교회의 지도자들이 질서마저 흐트린다면 이 사회가, 이 교회가 어찌 되겠습니까?

존 칼빈의 경고가 참으로 가슴 깊이 아리는 시대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찢어내고 첨삭하려 해도 성경 원래의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추부길 목사(웰빙교회 담임목사 한국가정사역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