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내가 평소에 존경하고 가까이 지내는 한 목회자의 글을 읽으며 마음 깊은 곳에 무거운 부담을 느꼈다. 그리고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한다. “파수꾼이 칼이 오는 것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면 그 피를 내가 그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에스겔서 33:6).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다.

이 말씀의 무게는 두 방향으로 동시에 다가온다. 경고를 듣지 못한 백성은 결국 그 죄 가운데서 망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백성의 죄를 지적하지 않고 침묵한 파수꾼에게 하나님은 그 피의 책임을 묻겠다고 하신다. 다시 말해, 백성은 죄로 인해 무너지지만 그 죄를 외치지 않은 파수꾼, 오늘의 목회자들에게 그 핏값을 찾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이 시대를 향해 울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예언자의 음성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도 말하지 않고 있는가.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하는 날이다. 그러나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보여준 모습은 그 거룩한 본질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예배의 중심에 어느새 사람이 서 있다. 세상의 권위를 대표하는 인사의 메시지가 강단을 채우고, 누가 그 자리에 섰는지가 더 주목받으며,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가 아니라 하나의 행사처럼 변해가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흐려지고 있는 심각한 영적 문제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시작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초기 선교사였던 헨리 아펜젤러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드렸던 첫 부활절 예배는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초라한 공간, 부족한 환경 속에서 드려진 예배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분명한 중심이 있었다. 사람을 드러내려는 어떤 의도도 없었고,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하려는 순전한 마음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예배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자리였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겉으로는 더 크고 화려해졌지만, 그 중심은 오히려 흐려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배의 외형은 성장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할 영광이 사람에게로 흘러가고 있다면, 우리는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배는 결코 사람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할 영광이 사람에게 나누어지는 순간, 그 예배는 이미 중심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침묵하는 순간, 그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파수꾼이 침묵할 때 백성이 무너졌듯이, 오늘도 진리가 선포되지 않을 때 성도는 방향을 잃고 결국 영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교회는 세상과 소통해야 하지만 세상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을 드러내려 할 때 복음의 능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초대교회는 권력을 의지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하나님만을 높이며 핍박 속에서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이 종소리는 누구를 위해 울리고 있는가. 이 예배는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외면한다면 그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파수꾼이 침묵할 때 그 피를 그에게 묻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지금은 침묵할 때가 아니다. 교회는 다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부활절의 종소리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종은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울려야 한다. 이 중심이 회복될 때에만 교회는 다시 교회로 서게 될 것이다.

미주 기독일보 대표 이인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