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에게 묻기를 계명 중 어느 것이 제일이냐고 했다. 이 때 주님은 하나님을 온 마음과 정성, 뜻과 생명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도 이와 같이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말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의 헬라어를 분석하지 않을지라도 자신의 아들까지 주시는,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자신의 신성을 포기한 채 인간을 위한 희생적인 사랑으로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랑이 없으면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하더라도,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다.
우리는 주위에 위대한 설교가들을 본다. 큰 목회를 하는 사람들을 본다. 닮고 싶고, 되고 싶은 인물들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과연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무엇 소용이 있을까? 자문하여 본다. 정말 나는 이기적이거나, 자랑하지 않는 사랑을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년말 년시가 되어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이 봉사하고 수고한다. 피곤하여 파김치가 될 때까지 죽어라 뛰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이런 모든 수고나 봉사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어려워진다. 주저하게 된다. 무례하지 않는 사랑을, 온유한 사랑을 행할 수 있을까?
그것에다가 모든 것을 참으며, 견디는 사랑을 하기란 정말 고되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아닙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인 사랑만이라도 순간적인 사랑만이라도 행하면 된다고 말이다. 정말 그럴까? 온전하게 사랑하라고 한다. 온 뜻과 정성, 심지어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데 순간적인 사랑만으로 만족하기란 말이 안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사랑은 부분적인 사랑임에는 틀림없다. 순간적인 사랑임에는 틀림없다. 찬송을 부를 때, 기도할 때, 봉사할 때, 수고할 때, 전도할 때, 공부할 때, 희생할 때에 정말 진실하게 했다. 사심 없이 행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적이지 못하는데서 우리는 힘들어 한다. 지친다. 마치 로뎀나무 아래 앉을 엘리야가 되는 듯하다. 이 때 우리는 다시 눈을 뜨게 된다. 고린도전서 13장 마지막절, 13절이다.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 하나라는 것이다.
온전한 사랑을 행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을 갖고 있다.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 믿음으로 그의 약속을 소망한다. 내일 바라본다. 믿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평의 관계를 갖게 된다. 그러면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과 관계를 형성시키는 것이다. 이미 형성되었다. 믿음은 온전한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 청동 거울을 보는 것 우리의 모습이 희미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주님이 나를 아신 것 같이 우리 자신을 완전히 알 때가 올 것이다. 이런 소망을 갖고 있다. 이런 소망은 믿음으로 가진 것이다. 이런 믿음과 소망이 사랑으로 연결되어 항상 있다고 한다. 그러면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 하나가 되는 셈이다.
완전한 사랑은 믿음과 소망으로 표현된다. 겨자씨 한 알과 같은 믿음이 있어도 놀라운 기적을 이룬다. 그러한 믿음을 우리는 소유하고 있다.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말이다. 그 믿음 안에서 소망을 가진다. 그 믿음 안에서 그를 사랑할 수 있다. 부족하지만 그는 우리의 사랑,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인정하시는 주님께서 믿음과 소망으로 어우러지는 사랑을 받는다고 믿는다. 아니 확신한다.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은 하나이다. 온전한 사랑은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그럴 때 우리는 자랑하지 않고,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랑, 즉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사랑을 하게 된다. 우리의 봉사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온전한 사랑을 향하여 나아가는 중이다.
라은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정말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의 헬라어를 분석하지 않을지라도 자신의 아들까지 주시는,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자신의 신성을 포기한 채 인간을 위한 희생적인 사랑으로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랑이 없으면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하더라도,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다.
우리는 주위에 위대한 설교가들을 본다. 큰 목회를 하는 사람들을 본다. 닮고 싶고, 되고 싶은 인물들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과연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무엇 소용이 있을까? 자문하여 본다. 정말 나는 이기적이거나, 자랑하지 않는 사랑을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년말 년시가 되어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이 봉사하고 수고한다. 피곤하여 파김치가 될 때까지 죽어라 뛰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이런 모든 수고나 봉사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어려워진다. 주저하게 된다. 무례하지 않는 사랑을, 온유한 사랑을 행할 수 있을까?
그것에다가 모든 것을 참으며, 견디는 사랑을 하기란 정말 고되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아닙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인 사랑만이라도 순간적인 사랑만이라도 행하면 된다고 말이다. 정말 그럴까? 온전하게 사랑하라고 한다. 온 뜻과 정성, 심지어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데 순간적인 사랑만으로 만족하기란 말이 안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사랑은 부분적인 사랑임에는 틀림없다. 순간적인 사랑임에는 틀림없다. 찬송을 부를 때, 기도할 때, 봉사할 때, 수고할 때, 전도할 때, 공부할 때, 희생할 때에 정말 진실하게 했다. 사심 없이 행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적이지 못하는데서 우리는 힘들어 한다. 지친다. 마치 로뎀나무 아래 앉을 엘리야가 되는 듯하다. 이 때 우리는 다시 눈을 뜨게 된다. 고린도전서 13장 마지막절, 13절이다.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 하나라는 것이다.
온전한 사랑을 행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을 갖고 있다.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 믿음으로 그의 약속을 소망한다. 내일 바라본다. 믿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평의 관계를 갖게 된다. 그러면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과 관계를 형성시키는 것이다. 이미 형성되었다. 믿음은 온전한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 청동 거울을 보는 것 우리의 모습이 희미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주님이 나를 아신 것 같이 우리 자신을 완전히 알 때가 올 것이다. 이런 소망을 갖고 있다. 이런 소망은 믿음으로 가진 것이다. 이런 믿음과 소망이 사랑으로 연결되어 항상 있다고 한다. 그러면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 하나가 되는 셈이다.
완전한 사랑은 믿음과 소망으로 표현된다. 겨자씨 한 알과 같은 믿음이 있어도 놀라운 기적을 이룬다. 그러한 믿음을 우리는 소유하고 있다.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말이다. 그 믿음 안에서 소망을 가진다. 그 믿음 안에서 그를 사랑할 수 있다. 부족하지만 그는 우리의 사랑,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인정하시는 주님께서 믿음과 소망으로 어우러지는 사랑을 받는다고 믿는다. 아니 확신한다.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은 하나이다. 온전한 사랑은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그럴 때 우리는 자랑하지 않고,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랑, 즉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사랑을 하게 된다. 우리의 봉사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온전한 사랑을 향하여 나아가는 중이다.
라은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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