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도 새 봄의 소망과 함께 교회는 고난절, 부활절, 그리고 성만찬 예식으로 이어지는 절기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대단히 아쉽게도, 개신교회 일부에서는 벌써 오래 전에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으로 돌아가서 로마 가톨릭의 예전과 예식을 폐지시켰음을 잊고 있거나, 무지한 상태에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구속사역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이해하고, 묵상하며, 예배로 영광을 올려드려야 하겠다.
1. 구속 사역의 총체적 전개와 그 절정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단계별 성취와 승천, 그리고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로 널리 펼쳐졌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시작된 마지막 날의 구원 사역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정점에 달하였고, 승천과 하늘 보좌에로의 복귀를 통해서 승리를 이뤘다. 그리스도가 보내신 성령의 권능을 통해서 제자들이 전도와 세계 선교를 성취하도록 돌보셨다. 마지막 재림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최종 심판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신다. 따라서 신비롭고 오묘하게 진행되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전개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고, 합당한 예배를 올려야만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치밀한 구속사역을 항상 종합적으로 전망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들 중에서 어느 한 가지에만 집착하거나, 매달리는 것은 성경의 총체적 교훈에 적합하지 않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각 단계 마다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어느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만 기념 예배를 올리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 성탄절, 수난절, 부활절, 승천절, 성령강림절 등등 절기 행사를 통해서 그저 반복적이요, 의례적인 기념식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과거의 구속 사역을 그저 기억하거나,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승리 사건들 속에 이미 참여한 자들이며, 연합된 자들로서 그 혜택을 누리는 자들이 되었다.
2. 고난과 영광의 긴밀성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심과 치욕스러운 형벌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수난절에 즈음하여, 일부라도 금식도 하면서 경건하게 동참하는 것은 성도로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마틴 루터 이후에도 여전히 개신교 교회가 오직 수난절에만 집중하는 것은 너무나 아쉽다. 죄인을 대신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생애 동안에 하나님의 모든 율법에 순종하시고, 마지막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어찌 우리가 그런 희생을 무덤덤하게 지나칠 수 있겠는가? 당연히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면서, 피와 땀을 바치시는 주님의 충성스러운 헌신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고난주간의 경건에 참여해야만 한다.
그러나 부활절에 즈음해서는 개신교회가 별다른 행사도 없다. 수난당하시는 주간에는 특별 새벽기도회, 금식 집회 등등 각종 행사들을 많이 진행하면서도, 부활절에는 아무런 행사도 없이 지나친다. 그나마 1980년대까지 한국에서는 지역별로, 교회협의회가 부활절 새벽 연합예배를 거행했다. 이른 새벽에 다함께 회집하여, 서로간에 성도의 희망과 감격을 나누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졌다. 부활의 역동적인 능력으로 이웃과의 사랑을 나누는 집회마저도 추억 속에 묻히고 말았다.
다시한번 정확히 지적하자면, 고난주간 특별기도회처럼 부활의 감격과 영광스러운 승리에 동참하는 기쁨을 나누는 행사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대속적 형벌과 십자가를 강조하는 신학에만 너무나 지나치게 치우쳤기 때문이다. 죄사함을 얻는 대속의 사역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보니, 천지를 진동시키는 부활의 권능과 감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말았다는 반성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고난에 동참하는 것과 동일하게, 부활의 감격과 기쁨에 동참하도록 복음의 두 중심내용을 전달하여야만 한다.
첫 부활사건의 현장을 살펴보자.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역사적 의미를 부활 사건 직후에 낙심하여 뿔뿔히 흩어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상세히 풀어주셨다. 누가복음 24장 초반에 나오는 엠마오 선상의 대화 속에서 예수님은 슬픔에 빠져있던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에게 오랜 시간 함께 걸음을 맞추셨다. 마침내, 모든 성경의 핵심이 되는 자신의 구속 사역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셨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십자가와 형벌은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 부활을 위해서 건어야할 순종의 단계임을 알려주셨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25-27)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당하신 고난(십자가)과 첫 영광 (부활)이 모든 구약성경의 초점이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셨다. 또 다시 부활 후, 제자들과의 모임에서 동일하게, 십자가와 부활의 긴밀한 연계를 설명하셨다. (눅 24:46-47).
부활의 권능을 깨우친 제자들은 기쁨과 희망, 벅찬 감격으로 충만케 되었다. 부활을 인식한 후에는 그 누구도 도망가거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십일간 하나님 나라의 일을 주님으로부터 최종 교육을 받았다. 부활의 감격에 충문했던 제자들은 누구도 불순종하거나 배신하지 않았고, 예루살렘를 떠나지도 않았다.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면서 백 이십 여명이 단단히 결집하였다. 마침내, 그 유명한 오순절, 수확을 감사하는 절기에 이르러서 예루살렘 교회가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즉 고난과 영광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이 연계되어져 있으며, 모든 성경의 교훈들이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복음은 바로 죄인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믿음으로 새 생명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고난절 행사를 강조하듯이, 부활 신앙의 영광과 승리를 똑같이 강조해야만 한다.
종교개혁의 신학을 계승한 개신교 교회에서는 부활절을 매우 중요시 했다. 부활은 유럽의 문화 속에 스며들어서, “새 창조, 깨어남, 재탄생”을 의미했다. 우선 국가 사회적으로 부활절에는 며칠간의 공휴일로서 다함께 교회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우선 순위로 하여서 즐기는 계절이었다. “성 금요일” 오후에는 거의 모든 교회마다 운집했다. 모든 각급 학교의 일시적인 방학 (요즈음 스프링 브레이크가 되었는데) 이 있었다. 부활절에는 회사에서도 한 두 주간 휴가를 주었다.
19세기에 독일 교회에서 부활절 행사를 널리 확산시켰다. 예배에는 새로이 지은 흰색 옷을 입고 참여하였으며, 꽃다발 등 부활절 장식을 특별히 하도록 확산시켰다. 또한 “부활절 토끼”(Easter Bunny)가 들판에 가져다 놓은 달걀을 아이들이 찾는 행사를 해왔다. “부활절 달걀 사냥” (Easter Egg Hunts)을 하는데, 착한 일을 한 아이들은 예쁘게 색칠이 된 달걀을 찾는다는 식으로 행동을 평가받기도 했다. 그리고, 점차 부활절에는 초콜렛으로 만든 토끼라든지, 각양 달걀 모양의 쵸콜 과자를 선물하는 풍습이 내려오고 있다. 더구나 황금색 토끼를 뜰에 만들어 놓고, 그와 함께 다가올 기적을 바라는 기대감이 확산되었다.
이런 지난 날의 역사들이 있었다고해서, 우리가 지금도 수난절이나 부활절 등등 일회성 절기 행사에만 참여하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항상 믿음으로 살면서, 성령의 내주하심 가운데서 모든 일상에 임재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행한다. 모든 고난들을 견뎌내고, 최후의 승리를 바라보는 전망으로 살면서 성령의 능력으로 힘을 공급하시는 은혜를 입어서 살아가는 것이다.
3. 의심과 두려움을 벗겨주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일대 사건이었다. 아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부활 사실을 받아들이고, 충분히 이해하기까지 잠시 동안 혼란이 불가피했다. 엠마오 사건을 체험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열한 사도와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이미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목격했던 사도들은 반신반의 상태였다. 첫 목격자들의 증언을 들으면서도, 부활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지에 대해서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었다.
[2026-03-17 오전 9:08] John Lee LA: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사건들이라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확고한 인식 부족을 드러내고 있었다. 누가복음 24장 37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출현 앞에서 “놀라고 무서워하였다.” 십자가의 충격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기에, 부활하신 주 예수님의 출현 앞에서 놀랐고, 동시에 의구심이 솟구쳤다.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지자, 마치 다시 만난 주 예수님을 유령처럼 생각했다.
예수님은 불신앙과 두려움, 두 가지를 지적하셨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유령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하게 설명하시고, 보여주셨다 (눅 24:39-40). 창에 찔리고 못이 박힌 손과 발을 보여주셨다. 유령이 아니라 변화된 몸이심을 확실히 믿게 해 주셨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요 20:27)고 지적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부활도, 의심할 뿐만 아니라, 아예 비판하고 비평하는 자들이 19세기 독일 헤겔 철학의 영향으로 확산되었다. 베를린 대학에서 쉴라이어막허로부터 강의를 들었던 데이빗 스트라우쓰는 신약 복음서에 담겨진 기적적인 사건들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인식한 것들에 대한 “신화적 표현”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요한복음의 내용들이 신화적 특성을 가졌다고 비난하면서, 역사적 예수의 탐구는 오직 헤겔주의적인 비평학에 의해서만 이성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스트라우쓰가 신화적 특성이라고 규정한 것은 유대주의적 예언들을 성취하는 메시야로서 예수를 제시하려고 신약성경과 초대 기독교가 이런 기적들을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구속사역들을 인간들의 종교적 “환상”이 반영된 것이라고 비평했다. 불트만은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현대인에게는 의미가 없는 신화였기에 고린도전서 13장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모두 다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들로서, 자신들의 허망한 이론을 더 중히 여기고 주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불신자들에게서 결국 무신론주의자 칼 마르크스가 길러졌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바, 그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죄사함을 얻고, 부활의 새 생명을 부여받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구속사건으로서 중심일 뿐만 아니라, 그것에 연계된 의미도 더없이 중요하다.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서 절정에 달하는 바, 각기 서로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는 두 개의 중심축이다. 우리 성도들의 믿음은 십자가 신앙이어야 하고, 부활 신앙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4.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그 핵심이 그의 죽음과 부활로 구성된다. 성도가 세례를 받게 될 때에, 실존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체득되며, 각인된다. 성도들은 성령의 역사 속에서 믿음을 얻어서,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면서 연합된 자가 되었다. 믿음과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에게는 영생이 시작되었고, 열매를 향한 삶이 진행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은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다 (롬 6:5).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중생하고 세례를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또한 그의 부활에 참여한 자가 된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에게는 사망이 주장할 수 없다 (롬 6:9).
로마서 8장 17절에서 바울 사도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교훈한다. 이어서 “현재의 고난”은 “장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롬 8:18).
그리스도의 수난과 영광의 부활은 종말론적인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에게 주어진 삶의 지표이자, 행동 규칙이다.
아멘, 할렐루야!































![김라니 목사 선교 에세이 [그 눈물이 찬양이 되기까지]](https://kr.christianitydaily.com/data/images/full/145528/image.jpg?w=250&h=154&l=50&t=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