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Photo : ) 신성욱 교수

[1] 연봉 9천억 원이 넘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 그는 투수와 타자를 동시에 해내는 ‘이도류’의 기적을 현실로 만든 선수다. 그의 타고난 재능과 피나는 노력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 뒤에는 한 사람의 조용한 스승이 있었다. 바로 일본 하나마키히가시 고등학교의 ‘사사키 히로시’ 감독이다. 오타니는 그를 ‘은사님’이라 부르며 존경하지만, 사사키 감독은 오히려 손사래를 친다.

[2] “나는 시속 160km의 공을 던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를 기술적으로 가르칠 수 없었지요.”
그리고 그는 덧붙인다.
“내가 오타니에게 가르친 것은 공을 던지는 기술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사사키 감독은 오타니에게 정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하도록 도운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3] ‘어떻게 던질 것인가’보다, ‘왜 던지는가?’를 먼저 묻게 했고, 연습의 방법보다 ‘목표 설정’과 ‘그에 이르는 전략’을 스스로 구상하게 했다. 다시 말해, 그는 야구를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 ‘자기 주도적 삶’의 기초를 가르쳤다. 사사키 감독이 오타니에게 시킨 것은 ‘독서’였다. 그는 말한다. “나는 오타니에게 책을 읽게 했을 뿐이다.” 스스로 사고하게 하고, 자기 삶의 방향과 방법을 주체적으로 결정하게 하는 훈련이었다.

[4] 많은 사람이 기술을 배우려 하지만, 정작 인생의 본질을 결정짓는 것은 기술(Skill)이 아니라 ‘사고방식’(Way of thinking)이다.
오늘날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칠 때, 얼마나 그 ‘기술’에 집중하고 있는가? ‘시험 점수, 외국어 회화 능력, 컴퓨터 활용’ 등 눈에 보이는 실력은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생각하는 힘’이다.

[5]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경로를 고민하며, 실패를 반성하고, 다시 계획을 세울 줄 아는 사고력은 단기간에 주입할 수 없다. 그것은 묻고, 읽고, 돌아보고, 실천해 보는 많은 경험을 통해 조금씩 길러지기 때문이다.
사사키 감독이 깨우친 참된 스승의 모습은 이것이다.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배우도록 돕는 것이다.” 송숙희, 『하버드는 왜 독해력에 주목하는가』 (서울: 토트, 2025), 42.

[6] 오타니의 성공은 단지 그의 근육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훈련받은 ‘사고의 근육’이 낳은 결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고의 근육을 길러준 사람은, ‘무엇을 할지’(What to do)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할지’(How to think)를 묻도록 해준 스승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자녀에게, 학생에게, 심지어 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을 주려 하고 있는가?
‘더 좋은 학교, 더 좋은 성적, 더 높은 실력. 더 높은 직장’?

[7] 그러나 정작 ‘생각하는 법’, ‘방향을 분별하는 힘’,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분별력’은 얼마나 가르치고 있는지?
로마서 12장 2절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의 새로움’은 단순한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사고방식의 변혁’(metamorphosis)이다.

[8] ‘이 세대’는 정해진 틀을 따르라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즉,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신앙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사사키 감독이 오타니에게 책을 읽게 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다.
성경은 정보의 책이 아니라 ‘지혜의 책’이다.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9]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주의 율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시 119:165).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세상의 패턴’을 따라가지 않는다.그들은 스스로 사고하며, 분별하며, 성숙한 판단을 내린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10] 자녀에게 단지 공부만 시키고 있는가? 성도에게 순종만 강조하고 있는가? 제자에게 결과만 요구하고 있는가? 진정한 리더는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않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질문하게 한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고 계신다.
“네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느냐?”가 아니라 “너는 왜 그것을 하려 하느냐?”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