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
-Ross)와 데이비드 케슬러(David Kessler)가 함께 집필한 『인생 수업(Life Lessons)』을 아주 오랜만에 뒤졌다. 이 책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질문들―‘사랑, 용서, 두려움, 상실, 죽음, 삶의 의미’ 등―에 대해 깊은 통찰의 내용을 담은 책이다. 퀴블러 로스는 죽음과 임종에 대한 세계적인 권위자로서, 수천 명의 죽음을 앞둔 사람들과 그 가족을 만나면서 얻은 지혜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2] 한 분야에서 오랜 세월 사역한 전문가에게는 귀 기울여 들을 만한 사실이나 교훈이 분명히 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어느 날, 한 어머니가 퀴블러 로스를 찾아와 말했다. 자신이 아들이 갑작스럽게 사고로 세상을 떠나서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는데, 뜻밖에 거기 참석한 아들 친구들로부터 자신은 잘 모르고 있었던 그동안의 얘기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
[3] 사실 장례식이 끝난 자리, 조용한 눈물과 함께 훌쩍 떠나버린 아들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떠난 아들의 부재는 어머니의 가슴을 거칠게 후벼팠다. 너무 일찍, 너무 급하게,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떠났기에, 어머니는 감히 그의 이름조차 부르기 두려웠다.
그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의 집에 아들의 친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들은 슬픔을 꾹 참고, 망설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4] “어머니, 기억나세요? John이 학교에서 도시락을 몰래 바꿔치기했을 때요?” “그 애가 장난이 심하긴 했지만, 친구가 울면 꼭 뒤에서 간식을 몰래 쥐여줬어요.” “한 번은요, 저희가 다 같이 운동장에서 넘어졌는데, John이 제일 먼저 일어나 우리 손을 잡아 줬어요…” “John을 좋아하는 여학생이 몇이 있었는데,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상처를 입을까 봐 거절을 못 하는 일로 우리랑 얘기를 많이 나눌 정도로 배려심도 많았어요.”
[5] 사랑하는 아들의 일상들이 친구들을 통해 이어지는 동안, 어머니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흐느낌 대신 웃음이 새어 나왔고, 그 웃음 속에서 아들이 다시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그때 어머니는 깨달았다.
아들이 자기와 친구들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 사랑으로, 웃음으로 그곳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6] 어머니는 나직이 퀴블러 로스에게 말했다.
“그때 알았어요. 아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추억이었고, 슬픔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용기를 가르쳐준 건 결국 그 아이였다는 걸요.”
죽음은 삶의 끝일 수 있다. 하지만 추억은 끝이 아니다.
추억은, 사랑은, 웃음은 죽음을 넘어 계속 살아 있다. 영원까지.
[7] 사랑하는 사람은 떠났지만, 그가 남긴 평소의 따뜻함은 그가 나눠준 작은 웃음들 속에서, 친구들의 마음속에서, 어머니의 깊은 가슴속에서 살아남아 지금도 살아 있다. 그것이야말로 삶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위대한 선물 아닐까?
이 이야기를 상상하다 보니 앞서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코로나19 발생 전에 천국으로 이주하셨다.
[8] 방학 때 가족이 살고 있는 시카고에 있었다. 어느 날, 효심이 지극한 아내가 소파에 앉아서 시어머니인 내 어머니께 전화하는 것이었다. 전화를 끝낸 후 어머니가 해주신 얘기를 들려주었다. 우리 어머니는 처녀 시절부터 기도를 많이 하신 분이다. 집안 대소사까지 하나님이 꿈으로 어머니에게 다 알려주셔서 꿈쟁이로 소문나셨다. 내 예비고사 성적까지 꿈을 통해서 정확하게 알고 계셔서 깜짝 놀란 적이 있을 정도였다.
[9] 아내와의 통화에서 지난밤에 꾸신 꿈 얘기를 들려주셨나 보다. 이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찬양 소리가 들려와서 보니 천국 문 가까운 곳인 것 같은데, 그 찬양 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지 그 문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그렇게 바라셨는데, 그만 꿈에서 깨고 말았다시며 너무 속상해하고 아쉬워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천국이 그렇게 황홀한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10]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아버지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왔다. 저녁에 집에 들어와 보니 어머니가 의식이 없으셔서 병원으로 이송했는데, 아무래도 마지막이 될 거 같으니 한국에 들어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부랴부랴 아내와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임종하지 않으셨는데, 대구로 가는 리무진 좌석버스를 몇 시간 기다리는 동안 꿈속에서도 그렇게 바라시던 천국으로 이주하셨다고 한다.
[11] 그처럼 바람같이 훌쩍 떠나시는 바람에 홀로 남으신 아버지께서 무지 힘드셨다. 나중엔 우리 집 근처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작년 11월 8일, 아버지도 천국으로 이사 가셨다. 지금도 마지막으로 계셨던 요양병원 근처를 지나가면 아버지 생각이 간절하다. 지금 천국 어디에선가 어머니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계실 것이 눈에 선하다.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도 육체적으로만 이별할 뿐 영혼은 다시 재회할 수 있다.
[12]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 이 땅에 남은 건 그분들이 남긴 '추억'과 '사랑'이다.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이 몰려올 땐 평소 그분들과의 옛 추억을 더듬으면 미소가 터져 나오고 기쁨이 마음속에 잦아드는 걸 감지할 수 있다. 잠깐 있다가 안개처럼 사라질 몸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매일 매 순간 영원을 사모하고 준비하는 마음으로 멋지게 잘 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