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가 들어가면서 모르는 것이 더욱 많아집니다. 예수님과 복음 외에는 확신에 찬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질문을 하면 고심하게 됩니다. 인생은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다양한 문제를 만납니다. 하나의 문제가 끝나면 또 다른 문제가 찾아옵니다. 어떤 문제는 쉽게 해결됩니다. 어떤 문제는 오랜 세월이 흘러야 해결됩니다. 어떤 문제는 평생 동안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저는 문제가 있다면 반드시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해결책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 병이 있다면, 분명 약도 있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볼 때 경험하는 것처럼 문제에는 정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에서 직면하는 문제는 조금 다릅니다. 모든 문제에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문제는 잘 풀리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특히 고난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욥의 고난은 끝까지 설명되지 않은 고난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욥의 고난을 낭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욥이 당한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욥을 연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당한 고난을 통해 역전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욥은 그가 당한 고난의 이유를 모른 채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진정한 깊이는 풀리지 않은 것들 속에서 살아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풀리지 않은 것들은 우리 인생에서 끝까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왜 내게 생각지 않은 고통이 찾아왔을까? 왜 어떤 사랑은 그렇게 끝났을까? 왜 나는 그토록 아픈 상처를 받아야 했을까? 왜 어떤 사람들은 나를 그토록 싫어할까? 왜 어떤 문제는 그토록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일까? 왜 내 인생은 이토록 어려움이 연속되는 것일까? 우리가 경험하는 것처럼, ’왜‘ 라는 질문에 답을 얻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언젠가 “인생이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살아내야 할 신비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깊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신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하는 결단이 깊은 삶입니다. 깊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역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모호함을 즐길 줄 아는 것입니다. 한 때 저는 선이 분명한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한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제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철이 들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정한 선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도 바뀝니다. 가끔 그렇게 싫어했던 사람이 좋아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런 경험을 할 때면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제가 자주 반복해서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산다는 것 자체가 위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힘든 세상을 살아낸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일입니다. 저는 이민자로 남의 나라에 뿌리를 내리며 산다는 것이 정말로 힘들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나이가 들어가는 어른들은 아픈 곳이 점점 늘어납니다. 약을 복용하는 숫자도 늘어납니다. 병원도 자주 방문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살아낸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저는 문제에 직면하면 가능한 빨리 해결하고 싶은 충동이 솟구칩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또한 당연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어느 정도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갈 때 성숙해집니다. 삶의 깊이가 더해집니다.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성숙시킨 것은 고통입니다. 예상치 않았던 문제입니다. 인생의 역설이며, 신비입니다. 문제 속에서 여전히 평강을 유지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문제 가운데서도 감사하고 행복해할 줄 아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가끔, 어떤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래서 행복을 보류합니다. 기쁨도 보류합니다. 삶의 소중한 기회마저 놓쳐 버립니다. 그런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끌어안고 살았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날마다 그를 찔렀습니다. 하지만 그는 육체의 가시를 끌어안은 채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그는 육체의 가시를 핑계로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육체의 가시를 안고도 전도에 힘썼습니다. 제자들을 양육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편지를 써서 지속적으로 일꾼을 양육했습니다. 성경은 그의 육체의 연약함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은총의 도구가 되었다고 증언합니다(고후 12:7-10). 조개가 상처를 끌어안을 때 그에게 찾아온 상처가 진주가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은 문제 때문에 경험한 역설적 축복입니다. 문제를 밀어내면, 기적 또한 함께 물러갑니다.
깊은 신앙이란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팀 켈러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은 질문입니다. 의문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우리는 정답을 통해서가 아니라, 질문을 사랑함으로 더 깊어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히 이해해야 할 인식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적으로 신뢰해야 할 대상입니다.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이 어찌 크신 하나님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정도의 문제는 끌어안고 살아내십시오. 어느 정도의 상처는 끌어안고 살아내십시오. 우리가 끌어안은 문제가 기적을 선물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끌어안은 상처가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진주를 선물해 줄 수 있습니다. 끌어안은 고통이 진주가 됩니다.
우리는 모두 깊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원숙한 어른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문제는 끌어안고 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세월이 깊어갈수록 더욱 깊이 있는 사람이 되길 소원해 봅니다.
목양실에서 강준민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