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Photo : ) 신성욱 교수

[1] 최근 '샘솟는기쁨 출판사'에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쓴 신간을 출간했다. 책명은 『아주 가까이 죽음을 마주했을 때』 (샘솟는기쁨, 2025)이다. 그 책 94페이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사실이다. 우리 외할아버지를 뜨거운 불로 화장하여 차가운 강에 재를 뿌린다고 한다. 내가 죽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아무도 죽게 하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이 어디서나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할 것이다.

[2] 재가 뿌려질 그 강에서 할아버지는 멋진 숭어를 낚곤 하셨다. 할아버지가 영원히 죽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너무 슬프지 않다면 얼마나 좋을까.”
외할아버지가 말기 환자로 집에서 돌봄을 받다가 돌아가셨는데, 손자가 학교에서 쓴 글의 애틋하고도 진솔한 내용이다.
이 얼마나 절절한 고백인가.

[3] 이 소년의 마음에는 슬픔도 있고, 분노도 있고, 그리움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죽음을 거부하고 싶은 순전한 사랑이 담겨 있다. 이 글은 단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잃을 때 마주하는 모든 인간의 마음을 대변한다.
소년은 “내가 죽음이라면 아무도 죽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일까? 그 이유는 단 하나이다. 사랑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4] 사랑은 죽음을 거부한다. 사랑은 영원을 원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별이 고통스럽고, 죽음이 두려워한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에게서 사랑하는 이를 빼앗을 수는 있어도, 사랑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 재가 되어 강에 뿌려진다 해도,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은 기억되고, 남겨지고, 다시 피어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사랑이 위대하다 해도 사랑만으로는 죽음을 이길 수 없다.

[5] 슬픔만으로는 영원을 준비할 수 없다. 슬픔을 넘어서는 영원한 소망을 주는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밖에 없다.
고전 15:54절은 말한다. “사망이 생명에게 삼켜졌다”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복음’, 슬픔이 우리가 부르짖어야 할 마지막 단어가 아니라는 약속이다.
예수께서 우리보다 먼저 죽음을 지나셨고 다시 살아나셔서 영원의 문을 여셨기에, 우리는 ‘이별’을 ‘기다림’으로 바꿀 수 있다.

[6] 소년이 그리워하던 외할아버지, 그분은 영영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가 평소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생명줄로 잡고 있었다면 천국에서의 재회가 가능하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생명으로, 우리보다 먼저 천국에 입성했을 것이다.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냉엄한 현실이다. 하지만 그 죽음이 영원을 준비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고통이 아니라 축복의 문이 될 수 있다.

[7] 소년이 말했다. “나도 너무 슬프지 않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겐 죽음이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다. 비록 짧은 순간은 슬프겠지만, 그 슬픔이 사랑의 증거이고, 믿음이 그 슬픔을 소망으로 바꾸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스펄전 목사님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Death is no punishment to the believer: it is the gate of endless joy.”

[8] “신자에게 죽음은 벌이 아니라 끝없는 기쁨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정말 멋진 말이다. 우리가 존경했던 존 맥아더 목사님도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 영원한 천국에 우리 앞서 입성했다.
다음은 우리 차례다.
오늘 하루가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멋지게 잘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