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오랜만에 시 한 편을 읽었다. 아주 간결한 시여서 좋았다. 애틋한 사연이 있는 시여서 더욱 끌렸다. ‘오르텅스 블루’(Hortense Vlou)의 시인데, 프랑스어 원문을 소개한 후 우리말로도 옮겨본다.
il se sentait si seul
dans ce désert
que parfois
il marchait à reculons
pour voir quelques traces
devant lui
<사막>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2] 오르텅스 블루의 이 짧은 시는 '류시화 시인'의 치유 시 모음집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에 처음 등장한다. 류시화 시인을 잘 모르는 이는 십중팔구 그가 여류 시인일 거로 생각하게 된다. 본명이 안재찬인 그는 시와 번역, 여행기,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며, 현대 한국에서 ‘영성’과 ‘치유’에 관한 글을 쓰는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서 꾸준히 대중적 인기와 공감을 얻고 있다.
[3] 나 역시 그의 시를 즐겨 읽는다. 서민적이면서 아름다운 언어로 전개되는 그의 시는 독자들의 마음에 공감대를 갖게 해주는 친밀감이 있기 때문이요, 상처와 고독으로 신음하는 이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평온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류시화 시인이 오르텅스 블루의 시를 소개할 때 게재 허락을 받기 위해 시인의 연락처를 수소문하는 수고를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4] 그 시가 파리 지하철 공사가 매년 공모하는 시 콩쿠르에서 8천 편의 응모작 중 1등 당선된 작품이기 때문에 지하철 공사에 전화를 걸어 문의한 끝에 어렵게 주소를 구할 수 있었다. 전화도 이메일도 소유하지 않았기에 주소로 편지를 보내고 한 달을 기다렸으나 답장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파리에 사는 화가 친구에게 부탁해 시인을 찾아가게 했다. 추운 겨울 아침 일찍, 주소지에 도착해 벨을 누르자 아시아계 남자가 문을 열었다.
[5] 오르텅스 블루의 전남편이었다.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자 거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오르텅스가 말했다.
“당신을 알아. 하지만 시 게재를 허락할 수 없어. 시가 완벽하지 않으니까.”
어떤 점에서 시가 완벽하지 않은지 묻자, 그녀는 전남편에게 시가 적힌 종이를 가져오게 해서 한 부분을 짚으며 이렇게 말했다.
[6] “여기 이 ‘너무도(si)’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냐고 다시 묻자, 그녀는 말했다.
“그때 내가 느낀 외로움은, 이 ‘너무도’로는 표현이 안 돼.”
‘너무도 외로워’라는 문구가 맘에 들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구부렸는데, 그 모습을 보고 친구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7] 류시화 시인의 친구가 본 그녀는 걸을 때 비틀거렸고, 키가 작았으며, 말랐다고 했다. 30대임에도 등이 구부정하게 휘어 있었다. 그녀는 친구에게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고, 화가라고 하자 자기도 그림을 그린다며 자화상을 보여주었다. 볼펜과 사인펜으로 그렸는데, 입술만 붉게 칠해져 있었다. 그림이 좋다고 했더니,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테이블 옆 단지 안에서 이것저것 꺼내 보여주었다.
[8] 젊었을 때 어린 아들을 안고 웃는 사진, 첫사랑이 준 그림 한 점, 그리고 몇몇 사진들.
<사막>은 정신병원에 있을 때 쓴 시라고 했다. 첫사랑과 헤어진 충격으로 그녀는 정신발작을 일으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병이 호전되자 영화관에서 일하며 전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정신병이 재발해 또다시 병원을 들락거리고 이혼하고, 그러나 돌봐줄 이가 없어 전남편과 아들과 여전히 한집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9] 집 안에는 다리가 부러진 의자가 있고, 몇 안 되는 가구는 쇠사슬로 바닥에 고정돼 있었다. 발작이 일어나면 힘이 세져 가구를 집어던지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가야겠다며 친구가 일어서자, 그녀가 말했다.
“시가 완벽하진 않지만, 당신이 좋아졌어. 그러니까 허락할게. 내 시를 책에 실어도 좋아."
‘너무도’로는 도저히 표현이 안 될 만큼 고독의 밑바닥까지 간 사람,
[10] 거기서 ‘시’라는 한오라기 가는 실을 붙잡고 간신히 일어선 사람이 쓴 시다. 그 시가 소개된 후,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외로움에 공감하고 치유를 받았다고 했다. 첫사랑으로부터 거절당한 아픔이 얼마나 크고 외로웠으면, 뒷걸음질 쳐서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이라도 보고자 했을까? 그렇게 ‘사막에서 외로워’라고 썼음에도, 그 단어로는 당시 자신이 경험한 외로움의 강도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고 불만족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내 가슴도 저며온다.
[11] 사람이 외로우면 견딜 수 없어지기 마련이다. 그 대상이 첫사랑이든 부모 형제든, 정든 친구든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자살로 생의 마침표를 찍는 이가 많은 것이다. 그녀의 사연을 가슴으로 느껴보니, 지상 최고의 외로움을 맛보았을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온 인류의 죄를 뒤집어쓰신 채 아버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죽음이라는 처절한 아픔을 경험하신 분이시다.
[12] 그 대속으로 인한 고뇌와 고통이 얼마나 두렵고 떨렸기에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a)라고 호소하셨을까? 한순간도 떨어질 수 없었던 아버지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한 고독이 얼마나 크고 깊었으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라고 절규하다 가셨을까?
하지만 그분은 다음의 말씀으로 마침내 승리하셨다.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 16:39b).
[13] “다 이루었다”(요 19::30).
그래서 그분은 모든 인류의 아픔과 고통과 고독에 능히 ‘함께(공감, 동참)하실’(συμπαθῆσα, 히 4:15) 수 있는 ‘상처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가 되신 것이다.
이 글을 쓰노라니 문득 <찬송가 86장>의 가사가 떠올라 조용히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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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 나의 상처 입은 심령을
불쌍하게 여기사 위로하여 주시니 미쁘신 나의 좋은 친구
<후렴>
내가 의지하는 예수 나의 사모하는 친구
나의 기도 들으사 응답하여 주시니 미쁘신 나의 좋은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