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아 아놀드 작가. ©washingtonstand.com
조슈아 아놀드 작가. ©washingtonstand.com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조슈아 아놀드 작가의 기고글인 '텍사스 홍수는 왜 발생했는가?'(Why did the Texas floods happen?)를 12일 게재했다. 

조슈아 아놀드 작가는 워싱턴 스탠드의 선임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뉴스와 논평에 모두 기여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지난 주말 미국 텍사스 중부에 발생한 참혹한 홍수로 인해 최소 120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중 28명은 어린아이들이었다. 힐컨트리 지역에 약 30cm가량의 폭우가 내린 뒤, 과달루페 강(Guadalupe River)은 단 45분 만에 8미터 가까이 불어나 강가의 피서객들과 여름 캠프 참가자들을 덮쳤다. 그중 한 곳인 기독교 여성 캠프 '캠프 미스틱(Camp Mystic)'에서는 캠프 책임자를 포함해 27명의 참가자와 지도자가 목숨을 잃었다. 

각각의 죽음은 인생의 선율을 산산조각 내는 비통한 비극의 외침이며, 살아남은 이들을 절망의 벼랑 끝에 서게 하며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대부분 쉽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그 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우리의 이해를 넓히고 믿음을 깊게 하며, 슬픔 가운데서도 선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한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찾는 이유는, 그것이 오류 없이 하나님의 진리가 담긴 계시의 말씀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질문은 성경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텍사스 홍수 같은 재앙이 발생하는 것일까?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모든 죽음은 죄의 결과다.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며, 이로써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설명한다(로마서 5:12, 참조: 창세기 2:17, 3:22). 인류의 죄는 전 우주에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왔으며, "온 피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로마서 8:22). 고대 세계를 물로 심판하신 것도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을" 보신 결과였다(창세기 6:5, 17; 베드로후서 2:5 참조). 

하지만 "죄 → 죽음"이라는 일반적인 연결이, 모든 개인의 죽음이 특정한 개인의 심각한 죄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과 관계를 두 차례나 명확히 부정하셨다. 누가복음 13:2-5에서 예수님은 집단 재난의 희생자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죄인들이 아니라고 선언하시며,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9:3에서도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것이 그 사람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더 구체적인 설명, 즉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가리킨다. 이 주제는 매우 깊고 복잡해서 우리의 이해는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주권적'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인간이며, 그 차이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다.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이사야 55:9).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몇 가지는 성경을 통해 분명히 계시되었다. 그것은 곧 선하시며, 자비로우시며,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성품이라는 점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심지어 인간이 악하게 의도한 일마저도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신다고 증언한다. 요셉은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다"(창세기 50:20)고 말했다. 바울은 이를 더욱 확장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로마서 8:28)고 보증한다. 그 '모든 것'에는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로마서 8:35)도 포함된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자비롭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3장에서, 놀라운 점은 일부 사람들이 비극적으로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반역자, 곧 모든 인류를 당장 심판하지 않으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구원은 "사람의 뜻이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로마서 9:16). 심지어 노아 홍수 때에도 하나님은 자비의 언약을 세우셨다. "다시는 물로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라"(창세기 9:11). 이 언약의 표징은 무지개, 즉 하늘을 향해 활이 겨눠진 형태이다 - 전쟁의 무기가 이제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또한 헤아릴 수 없는 영역이다. 요셉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섭리의 목적을 드러내실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설명하실 의무도 없으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오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어찌하여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로마서 9:20). 욥기의 경우, 고난의 시작에 대한 하늘의 장면(욥기 1-2장)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욥에게 직접 설명하시지 않으신다. 

이러한 제한된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요구하게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1). 설명되지 않은 고통과 마주하며 우리는 성경의 중요한 신앙 범주인 탄식(lament) 을 배운다. 탄식은 시편 곳곳에서 발견되며, 예레미야애가 전체를 관통하고, 선지서들에도 광범위하게 등장한다. 탄식은 하나님께 우리의 아픔을 솔직하게 아뢰고, 말씀을 통해 그 고통을 해석하며, 주의 개입을 요청하고, 그분의 약속을 다시 붙드는 기도이다(참조: 마크 브루에고프의 『Dark Clouds, Deep Mercy』). 

탄식은 반드시 개인적인 비극을 겪은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함께 울 수 있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어쩌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예수님은 약속하셨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4). 

천 년 전 다윗도 같은 원칙을 노래했다. 백악관 신앙자문실이 이번 텍사스 홍수에 대해 발표하며 인용한 말씀이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편 34:18). 

개인적인 비극을 겪은 이들에게 이 같은 신학적 반추가 별 위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에 닿는 쓰라린 연고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온유하고 낮은 목자는 그 고통을 아시고 함께하신다. 때로는 그 쓰라림이 가장 필요한 치료제가 되기도 한다. 

1873년, 네 딸을 대서양 횡단 여객선 사고로 잃은 시카고의 사업가 호레이쇼 스패포드는 이렇게 썼다. "평화가 강물처럼 내 길을 인도하고, 고난이 물결처럼 몰아쳐도 나의 모든 형편 속에서 주께서 가르치셨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우리는 답을 알지 못하거나 무력감을 느낄 수 있지만, 슬픔이 홍수처럼 밀려올 때에도 하나님의 성품은 여전히 신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