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오늘은 아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 날이다. 이번 기독교 유적지 탐방 중 최고의 날이기 때문이다. 아침 9시에 출발해서 아베라본(Averavon)으로 향했다. 로이드 존스 목사가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청빙 받기 전 목회했던 ‘베들레헴 교회’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작년에는 교회 안에 들어가서 담임 목사의 설명도 듣고 강대상에서 사진도 찍을 수 있었는데, 올해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밖에서 개인과 단체 사진만 찍고 떠나왔다.
[2] 후임자가 없어서 몇 년간 은퇴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교회 문을 닫게 된 것이다. 너무 가슴이 아팠다. 로이드 존스가 목회를 시작한 이곳은 아베라본 샌드필즈의 가난한 지역이었다. 당시 지역 주민 약 90%는 당시 아무런 예배 처소에도 참석하지 않고 있었다. 로이드 존스는 사역 처음부터 명설교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설교 영향은 좁은 아베라본 동네에만 한정될 수 없이 영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3] 11년 반 동안의 사역을 통해서 93명의 등록 교인에서 700명의 등록 교인으로 교회가 성장했고, 평균 주일예배 출석은 550명 정도였다고 목회를 그만둔 담임 목사로부터 작년에 들은 바 있다. 로이드 존스 이후 제7대 담임인 제레미 베일리(Jenemy Bailey) 목사에 의하면 작년 출석 인원이 50~60명 정도라고 했다. 목사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영국 전반적으로 기독교가 쇠퇴일로에 놓여있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4] 로이드 존스의 제2차 목회 사역은 1938년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시작되어 30년간 계속되었다. ‘설교의 왕자’라는 별명을 가진 전임 캠벨 몰간 목사로부터 청빙을 받고 두 번째 목회를 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약 150명 정도까지 줄어든 교회가 전쟁이 끝난 후 약 500명의 성도들로서 실질적으로 새로운 교회를 시작한 셈이다. 거기서 깊이 있고 수준 높은 설교로 주일예배에 약 2,500명이 참석하는 런던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5]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내가 가장 감동받는 ‘웨일즈 성경 신학교’(The Bible College of Wales)이다. 원래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이 아닌 히틀러의 독일군이 승리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사람의 중보기도자를 세우셔서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향방을 가리게 하셨다. 그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중보기도의 대명사’로 유명한 ‘리즈 하월즈’(Rees Howells)이다. 웨일즈 성경 신학교에는 그가 늘 중보기도 했던 ‘블루룸’이 있다.
[6] 그 방이 리즈 하월즈가 세계 모든 나라에 일어나는 기도 제목을 갖고 뜨겁게 중보 기도한 바로 그 기적의 장소이다.
어느 날 선교 집회에서 하월즈는 전혀 꿈도 꾸지 못한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너는 저 아프리카의 영혼들을 네 친아들보다 더 사랑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라. 너희가 나를 위해서 포기한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내가 100배로 갚아 주겠다.
[7] 특히 아프리카의 일만의 영혼들을 달라고 주장해도 좋다!”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아프리카의 일만 명의 영혼을 구원시키는 역사를 이루게 해주셨다. 아프리카 선교를 마친 후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영국으로 돌아온 부부에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부르심이 임했다.
“나는 너를 통해 대학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금 삼천 파운드를 주겠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웨일즈 신학교 부지를 얻게 하셨다.
[8] 그렇게 해서 세워진 학교가 웨일즈 신학교이다. 하월즈와 관련된 기도 응답의 사례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기록할 수가 없는데, 하나만 더 언급해볼까 한다. 이것은 수년 전, 내가 관람했던 ‘덩케르크’(Dankirk)라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1940년 5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프랑스 육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그대로 영국 해협을 향해 돌진하며 진격을 이어갔기에 고립된 연합군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 사건이 벌어진다.
[9] 여기 이 사건이 이후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웨일즈 신학교 벽에 적힌 내용을 있는 그대로 번역해보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0년은 유럽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로, 여러 나라가 히틀러의 독일군에게 함락되었다. 프랑스군을 지원하던 영국 원정군(BEF)은 적에게 포위되어 덩케르크 항구 인근 지역으로 후퇴한 상태였다. 탈출은 불가능해 보였고, 이 끔찍한 상황에서 대학 교직원들의 중보기도는 끊이지 않았다.
[10] 전례 없는 조치로 히틀러는 장군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군대에 육지 진격을 보류하라고 명령했다. 비행기로 공격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습적인 폭풍우와 짙은 안개로 인해 독일군 비행기의 비행과 시야 확보가 어려웠고, 그 며칠 간의 틈을 타서 영국군은 5월 27일부터 6월 4일까지 며칠 동안 해상으로 조난자들을 대피시키는 기적적인 구조 작전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11] 윈스턴 처칠은 이 작전에서 총 338,226명(프랑스군 123,000명 포함)을 구출하여 ‘구국의 기적’이라고 칭송했다.” 당시 영국은 가용병력 40만 명 전체 병력을 총 투입했다. 만일 당시 이들이 섬멸당했다면 영국은 더 이상 싸울 병력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철수에 성공함으로써 영국은 훗날 반격을 할 수 있는 전력을 보존해서, 연합군은 이후 4년간 전 세계에서 독일과 싸움을 벌이다 마침내 승리할 수 있게 된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12] 당시 리즈 하월즈 자신은 독일의 공습이 시작되자 학교 강당에서 교직원 학생들과 함께 매일 아침 1시간, 점심 후에 1시간, 그리고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기도에 힘썼고, 공습이 절정에 달할 때마다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증거하고 있다.
롤랜드 에반스(Roland Evans) 목사의 증언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그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리즈 하월즈의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했다.
[13] 리즈 하월즈에 관한 이런 기적적인 얘기는 한도 끝도 없다. 세계 역사들 가운데 벌어진 믿을 수 없이 놀라운 기적의 배후에 그 방에서의 끊임없는 중보기도의 수고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큰 도전을 받고 나 역시 그런 중보기도의 사람이 되어야겠다 굳게 다짐했다.
우리 일행을 감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하월즈의 웨일즈 성경 신학교를 뒤로한 채 1904년 부흥의 불길이 붙었던 ‘모리아’(Moriah) 교회로 갔다.
[14] 1903년에, 4명의 웨일즈 청년들이 부흥을 사모하여 6개월 동안 매일 밤 기도회를 가졌다. 1904년, 26세의 젊은 신학생 ‘이반 로버츠’(Evan Roberts)가 성령 충만을 체험하고 부흥 운동의 주역으로 쓰임 받기 시작한다. 그는 12살 때부터 탄광에서 일하면서 몇 시간씩 성경을 읽고 기도에 전념했는데, 부흥이 일어나기 12년 전부터 웨일즈의 부흥을 사모하며 기도하고 친구들과 부흥에 관해 나누었다.
[15] 1904년 봄에 로버츠는 비상한 영적 체험을 했는데, 새벽 1시에 잠에서 깨어 4시간 동안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는 체험을 했고, 3~4개월 동안 매일 새벽에 이런 기도체험이 계속되었다. 로버츠는 이 경험 후에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어느 날, 그가 고향교회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부터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가 나타나 회중들이 눈물바다를 이루며, 가는 곳마다 수많은 영혼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다.
[16] 가장 기억에 남을 일들이 남 웨일즈에 있는 탄광 마을들에서 일어났다. 부흥의 물결이 탄광 지역에 몰아칠 때 지하 63미터 떨어진 갱도에서 80명의 광부들이 마태복음을 읽고 찬송을 부르고 ‘아멘!’을 외쳤다. 광부들 사이에 많은 기도회가 열렸고, 광부들의 노동이 질적으로 개선되었다. 술과 게으름과 도박이 줄어들었으며, 말을 부릴 때 욕설과 발길질이 없어지는 바람에 한동안 말들이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혼란에 빠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17] 오늘 우리 일행은 당시 많은 영국 광부들이 사역했던 탄광촌을 방문해서 지하 갱도 90미터 아래 땅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경험했을 모진 고초와 위험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들이 겪었을 애환을 상상해보니, 설교자들의 설교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었을지 미루어 짐작이 갔다. 그가 기도하다가 성령이 임한 그 장소에서 우리는 영국과 웨일즈와 우리나라와 우리 자신을 위해 뜨겁게 통성으로 기도했다.
[18]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일학교의 창시자인 Robert Raikes의 동상과 18세기 대각성(Great Awakening) 운동의 주심 인물 중 한 명으로,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복음을 전한 열정적인 부흥설교자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생가와 출석하고 설교했던 교회를 방문했다. 휫필드는 글로스터 시내 중심가의 ‘Bell Inn’(여관)에서 태어났다. 이 여관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글로스터 시청 주변에 그의 출생을 기념하는 ‘청동 명판’이 지금도 남아 있다.
[19] 휫필드는 글로스터의 ‘St. Mary de Crypt Church’에서 세례를 받았고, 1736년에 거기서 처음 설교도 했다. 영적으로 엄청난 침체에 빠져 있는 영국에 조지 뮬러, 리즈 하웰즈, 이반 로버츠, 웨슬리, 휫필드와 같은 위대한 신앙의 영웅들의 등장이 절실하다. 우리 대한민국도 마찬가지 상황인데, 기독교 유적지를 탐방하고 있는 나와 우리 일행이 먼저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변화됨과 중보기도자로의 거듭남이 필요함을 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