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Photo : ) 신성욱 교수

[1] 오늘은 내가 영국을 방문한 이래 가장 좋은 날씨이다. 작은 구름 조각 몇 개 외에 드넓은 영국 하늘이 온통 파란색이어서,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막힌 날씨다. 맨 먼저 방문한 곳은 George Whitefield, John Wesley, 모라비안 교도 John Cennick, 그리고 ‘성경 박사’라고 불렸던 Victory Purdy 같은 복음 전도자들이 설교했던 Hanham Mt.이다. 당시 탄광촌에서 노동하던 광부 1,500명이 모여 이곳에서 그들의 설교를 듣고 변화를 받았던 장소이다.

[2] 팻말이 있는 곳 위를 올라가면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설교했던 강단이 있고, ‘ALL THE WORLD IS MY PARISH’(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당시 그곳에 모인 수천 명 광부들의 검게 그을린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흰 자국을 만드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들의 애환을 체험해보기 위해서 처음으로 탄광촌을 탐방하기로 했다. 탄광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삶은 얘기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3] 그들은 술을 잘 마시고 욕도 잘하는 이들이다. 그랬던 광부들이 변화를 받자 제일 먼저 황당해했던 대상이 그들이 몰던 말들이었다고 한다. 평소 말에게 무거운 짐을 끌게 하고, 채찍과 욕설로 가고 멈추게 했던 그들의 행동이 달라지고 언어가 순화되니 말들이 주인의 말귀를 못 알아먹어서 말들이 출발하지 않거나 멈추질 않는 혼돈이 한동안 계속 되었다고 한다. 또한 범죄가 사라지니 경찰들이 할 일이 없어서 성가대를 조직하고 기도하러 다녔다고 한다.

[4] 그 현장에 오니 영국과 웨일즈와 내 영혼에 부흥의 불길이 다시금 새롭게 활활 타오르면 좋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이어서 찾아간 곳은 존 웨슬리가 처음 목회했던 브리스톨 중심지에 위치한 ‘뉴룸’(The New Room)이다. 이 교회는 1739년에 세워진 ‘세계 최초의 감리교회’이다.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 내에서 회심 운동을 벌였지만, 점차 기존 교회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그래서 거리 설교와 함께 브리스톨에서 자체 예배 장소를 마련하게 되었다.

[5] 당시 웨슬리와 다른 설교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예배당 위층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안에는 18세기 감리교 운동 관련 유물과 웨슬리의 설교 원고와 신앙 서적, 동생 찰스 웨슬리와 그의 가족들에 관한 자료, 그리고 웨슬리가 남긴 짧은 명문장들이 전시되어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An ounce of love is worth a pound of knowledge”(한 온스의 사랑이 한 파운드의 지식보다 가치 있다).

[6] “Give me one hundred preachers who fear nothing but sin and desire nothing but God, and I care not a straw whether they be clergymen or laymen; such alone will shake the gates of hell and set up the kingdom of heaven on earth.”(죄 외에는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설교자 100명을 주십시오. 성직자든 평신도든 상관없습니다. 그들만이 지옥문을 흔들고 지상천국을 세울 것입니다)

[7] 이 문구는 스코틀랜드의 개혁주의자이자 장로교회 창시자인 John Knox가 한 말로 자주 잘못 인용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John Wesley가 한 뜻깊은 말이다. 웨슬리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말도 주목할 팔요가 있다. 임종을 앞두고 그는 유언을 남기기 위해 온 가족을 모았다. 그는 마지막 60초간 자리에 앉아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The best of it is, God is with us”(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8] 그리고 다시 누워 두 손을 높이 들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다시 힘주어 그 말을 반복했다. 그 후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역사가들의 추정에 따르면, 웨슬리는 말을 타고 40만 km를 다녔으며 4만 번 이상 설교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 설교했고 목회했던 장소를 방문하니 그저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다음은 브리스톨의 영적 챔피언 중 한 분인 조지 뮬러의 고아원을 방문했다.

[9] 뮬러는 영국인이 아니라 독일 태생의 영국 복음주의자요, 선교사요, 자선가였다. 무엇보다 그는 '믿음의 기도와 고아 사역'으로 세계적인 유명한 인물이다. 그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삶과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경험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엔 도박과 방탕한 삶을 살았던 그가 20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심한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선교적 삶을 헌신하는데, 1836년, 아내 메리와 함께 고아 돌봄 사역을 시작했다.

[10] 당시 영국은 산업화로 인해 수많은 고아들이 길거리에 방치되었는데, 그는 한 번도 사람들에게 직접 후원 요청을 하지 않고, 오직 기도로만 필요를 채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삶의 원칙은 이것이었다. “기도하고 기다려라. 하나님이 공급하신다!”
브리스톨에서 고아원 운영해서, 60여 년 동안 5개의 고아원을 지었고, 약 10,000명 이상의 고아들을 돌보았다. 70세에 은퇴한 후 전 세계 42개국을 돌며 선교와 간증 여행을 했다.

[11] 요즘처럼 비행기를 타고 다녔어도 42개국을 다닌다는 것은 힘든 일일 텐데, 노구를 끌고 배를 타고 그렇게 많은 나라를 다니면서 선교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70세에 은퇴한 이들에게도 여전히 사명이 있음을 일깨우는 소중한 모델이다.
그가 살아생전 ‘5만 번' 기도 응답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 정확하게는 ‘십 수만 번’ 응답받았다고 그의 설교집에서 언급한 것을 확인한 적이 있다.

[12] 마지막 들른 곳이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하노버 교회’이다. 그 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마음이 짠해짐을 절감한다. 사랑하는 아들을 먼 곳에 선교사로 보낸 부모가 아들의 순교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마음이 어떠했을지 생각만 하면 가슴이 저며온다. 그것도 ‘개죽음했다’라는 당시 주위의 비난을 많이 받았다는 얘기를 현재 담임 목사님으로부터 듣고 나니 더욱 가슴이 찢어진다.

[13] 지금 그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분은 '유재연(Paul Yoo) 목사'이다. 나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인데, 통합 측 출신의 목사이다. 작년 이맘때 런던에서 내가 강의하는 이틀간의 설교세미나에 사모님과 함께 오셔서 만나고 딱 일 년 만에 반갑게 재회를 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가 개죽음이 아닌 것은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증명한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것은 그분의 순교가 존 로스로 하여금 한국 백성들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14] 그렇다. 인간의 눈으로는 부정적일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그것을 선용하셔서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위대한 일을 이루심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옥스퍼드대에 합격하고도 ‘New College’라는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10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언어의 귀재'였다. 당시 '설교의 황태자'라 불렸던 스펄전 목사님과 동시대의 인물인 그가 선교사로 가지 않고 목회를 했더라면 어땠을지 추정해볼 때가 있는데, 솔직히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목이다.

[15] 그가 그때 ‘제너럴셔먼호’를 타지 않았더라면 선교를 더 오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짧은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같지 않을 때가 많다. 비록 순교하기 직전,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성경을 던지며 짧게 외쳤던 ‘야소!’(耶蘇, '예수'의 음역)라는 말 한마디였지만, 그가 건넨 성경이 조선 내 기독교 전파의 씨앗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실제로 그가 전한 성경책은 집안의 벽지로 사용한 '성경 종잇조각'으로 쓰였다.

[16] 그것을 통해 복음을 알게 된 사람들이 후에 한국 기독교의 초기 신자가 되었다. 그 집에 살던 '박영식'이란 사람과 그 주변 인물이 이후 평양 대부흥 운동의 기반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는 우리의 짧은 지식으로는 다 알 수가 없다. 그렇다. 순교의 사역에 헛된 것은 없다. 토마스 선교사의 대동강 순교는 개죽음이 아니라, 조선과 대한민국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였다. 우리도 그 역사의 작은 도구로 요긴하게 쓰임 받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