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새벽 2시에 잠에서 깼다. 그 이후로 줄곧 성경 난제들을 풀고 강의를 위해 PPT로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게는 최고 행복한 시간이다. 그 외에도 자꾸만 떠오르는 신박한 아이디어나 착상을 몸이 따라가질 못해 늘 아쉽다.
아침 6시쯤, 창문을 여니 둥근 해가 벌써 떠올라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어제는 비가 계속 왔는데, 맑은 날씨를 보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2]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나서 오늘의 일정을 시작했다. 오늘은 리빙스턴 생가와 글래스고에 있는 존 녹스 동상 방문이 전부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우선 스코틀랜드 천문대가 있는 산에 올라갔다. 산 위에 올라보니 공기도 좋고 전망이 최고였다. 스코틀랜드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기가 막혔다. 저 멀리 해변 근처에 첫째 날 들렀던 스코틀랜드 성이 보였다.
[3] 가까이서 봤을 땐 한껏 높았던 성도 멀리 산 위에서 내려다보니 손바닥보다 더 작고 담벼락보다 더 낮아 보였다. 세상 군왕들과 천재 학자들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엔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일 것이다.
스코틀랜드 시를 눈에 담고 산에서 내려온 후 약 40분 정도 차로 달려서 블랜타이어(Blantyre)에 위치한 리빙스턴의 생가를 방문했다.
[4]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인데, 개인적으로는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방문하는 셈이다.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이라 하면 프랑스의 슈바이처 박사와 함께 어린 시절부터 존경했던 인물들이었다. 둘 다 신학을 전공한 의사로서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면서 환자들의 병을 고쳐준 박애 정신으로 유명한 분들이다. 물론 슈바이처 박사는 신학적으로 우리와는 사뭇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 늘 아쉬운 부분이 많은 인물이다.
[5] 데이빗 리빙스턴은 스코틀랜드 태생의 영국선교사로,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한 탐험가이자 노예제 폐지 운동가로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선교사로서 다양한 교육을 받은 리빙스턴은 원래는 중국으로 가기를 희망하였지만, 아편전쟁으로 인해 중국행이 무산된 이후 로버트 모펫을 만나 남아프리카 선교의 희망을 가지게 된다. 1841년, 남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아프리카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처음부터 녹록지 않았다.
[6] 한 예로, 1844년 마보차에서 선교 도중 마을에 사자 무리가 나타나 생활을 방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본인이 직접 사자 사냥에 나섰다가 사자에게 물리게 되어 평생 왼쪽 팔이 온전치 못하여 어깨 위로 팔을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1873년 5월 1일, 극도의 쇠약과 병으로 뱅웰루 호반에서 사망하였으며, 아프리카 사람들은 존경하는 그를 미라로 만들었다.
[7] 현재도 그의 심장은 영국 왕립지리학회에서 보존하고 있다는 설이 있으나 잠비아 북부의 치푼두라는 동네의 족장인 치탐보의 집 무푼두 나무 아래에 묻혀 있다. 그것은 리빙스턴을 미라로 만들기 위해 그의 장기를 모두 꺼내어야 했고, 무푼두 나무 아래에 고이 모셨으며 시신은 방부처리를 하고 햇빛에 보름 동안 건조, 미라로 만들었다.
[8] 그리고 약 2,000Km의 거리를 이동하여 지금의 탄자니아 수도 다르에스살람까지 운구했다. 운구하는 과정에 많은 위험과 어려움, 그리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면서 많은 이들이 도망을 갔지만, 오직 잠비아의 두 청년 추마(Chuma)와 수시(Susi)는 끝까지 리빙스턴의 시신을 지켰다고 한다. 장례는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우리가 방문한 박물관에는 그의 팔뼈와 머리카락이 전시되어 있었다.
[9] 하지만 사람은 다 공과 과가 있는 법, 리빙스턴 역시 긍정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부정적인 면도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비록 그가 노예제 반대와 인도주의를 외쳤지만, 그의 탐험과 기록은 영국 제국주의의 확장에 기여했다. 그가 발견한 지리 정보와 경로들은 이후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제로 그의 영향은 ‘문명화, 기독교화, 상업화’라는 명목으로 유럽 세력의 아프리카 침투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 게 사실이다.
[10] 또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의 문화를 유럽 중심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아프리카인의 신앙, 풍습, 사회 체계를 열등하거나 미개하다고 판단하고, 기독교와 서구 문명이 이를 교화해야 한다고 생각한 게 사실이다. 그런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리빙스턴을 위대한 인물로 꼽는 것은 그가 당시 많은 유럽 탐험가, 선교사들이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태도를 보였던 것과 달리, 상대적으로 현지인들과의 협력을 중시했다는 점 때문이다.
[11] 또 그가 ‘선교사이자 과학자, 인도주의자, 모험가’라는 새로운 복합적 역할을 수행했고, 단순한 전도가 아닌 삶을 통한 선교의 길을 개척했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그를 인류 가운데 찾아온 영웅 중 한 명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다음 찾아간 곳은 글래스고 성당 앞에 있는 리빙스턴의 동상과 거기서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공동묘지 언덕에 있는 그의 동상이다.
[12] 리빙스턴의 동상이 어째서 고향인 블랜타이어가 아닌 글래스고에 세워져 있는지 궁금해할 이가 있을 게다. 그는 어린 시절 면방직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도 야간 학교에 다니며 공부했고, 인근 지역에 있는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의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즉, 글래스고는 리빙스턴의 학문적, 인격적 성장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그의 동상은 스코틀랜드의 종교적, 과학적, 인도주의적 유산을 기리는 상징물로 간주되고 있다.
[13] 존 녹스의 동상은 글래스고 성당 뒤편 언덕 정상에 시내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웅장하게 우뚝 서 있다. 존 녹스는 16세기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의 지도자로서, 가톨릭을 거부하고 장로교를 기초로 한 스코틀랜드 교회 체계를 확립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우리가 방문한 동상은 단순한 인물 조형물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국민교회의 정체성과 신앙 자유를 기리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14] 글래스고 네크로폴리스에 있는 존 녹스의 동상은, 그가 이룬 종교 개혁과 장로교 전통을 기념하는 상징물로서 도시의 역사적·정신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기념비이다. 3일간 둘러본 스코틀랜드는 진리가 아닌 세속적 체제와 권력과의 전쟁에서 육탄으로 버티다가 피 뿌리고 죽어간 순교의 역사가 서려 있는 장엄한 곳이다. 제2의 종교 개혁이 절실한 한국 교회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산 순교자의 본을 보임으로 작은 변화라도 가져오게 해야겠다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