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을 정독하다 보면 낯선 표기를 마주칠 때가 있다. 개역개정 성경을 펼치면 간혹 “(없음)”이라는 단 두 글자가, 한 절을 온전히 대신하고 있는 경우가 그렇다. 한국 신자들에게 이 표시는 성경을 더 깊이 읽고 싶다는 마음에 적잖은 의문을 일으킨다. 왜 어떤 절은 아예 본문이 없을까? 다른 번역 성경은 어떻게 다룰까? 그리고 원어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성경의 역사와 사본 비평의 세계로 한걸음 들어서야 한다.
“(없음)”의 정체: 사본의 흔적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없음)”이라는 말은 성경 원문(히브리어나 헬라어)에 기록되어 있는 구절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후대에 성경을 번역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추가된 편집상의 표기다. 즉, 어떤 절은 후대 사본에는 존재하지만 가장 오래되고 신뢰할 만한 고대 사본들에는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차이를 반영하여, 현대 번역 성경은 해당 구절을 본문에서 제외하고, 대신 “(없음)”이라 명시하거나 각주로 처리한다.
개역개정의 “(없음)” 표기
한국 교회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개역개정 성경은, 신약에서 총 15군데를 “(없음)”이라고 표기한다. 대표적인 예로 마태복음 17장 21절, 요한복음 5장 4절, 사도행전 8장 37절 등이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7장 21절은 개역개정에서 이렇게 나타난다.
21절 (없음)
그러나 킹제임스성경(KJV)에서는 이렇게 적혀 있다.
21 However, this kind does not go out except by prayer and fasting. (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이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왜 개역개정은 이 구절을 뺐을까? 그것은 이 구절이 가장 신뢰받는 고대 사본들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후대 필사자들이 마가복음 9장 29절을 참고해 이 구절을 마태복음에도 추가했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이유로 개역개정은 본문에 싣지 않고 “(없음)”이라고 명시한다.
KJV의 입장: 사본보다는 전통
킹제임스성경(KJV)은 1611년에 번역되었으며, 당시 기준의 헬라어 사본들(주로 후대 사본인 중세 비잔틴 사본 계열)을 근거로 했다. KJV에는 오늘날 “(없음)”으로 표시된 많은 구절들이 여전히 본문으로 실려 있다.
예컨대 요한복음 5장 4절은 KJV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4 For an angel went down at a certain season into the pool, and troubled the water…
개역개정 성경은 3장 마지막부터 4장 전체를 [ ] 로 구분하고 있다.
이 구절은 벳사다 못에 내려온 천사가 물을 움직여 병자를 고친다는 전설적인 설명이다. 하지만 고대 사본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오늘날에는 후대의 전승이 본문에 삽입된 것으로 본다.
KJV는 교회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표준 성경으로 군림하며 신학과 신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덕분에 많은 구절들이 성경의 일부처럼 굳어졌지만, 학문적 관점에서는 반드시 본래의 성경 본문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다.
NIV의 방식: 깔끔한 삭제와 상세한 각주
NIV(New International Version)는 현대 비평학적 연구를 반영하여 가장 신뢰받는 고대 사본들에 없는 구절은 본문에서 완전히 삭제한다. 대신 각주(footnote)에 상세히 설명을 달아, 독자들이 사본 간 차이를 인지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예컨대 사도행전 8장 37절의 경우, NIV 본문에는 구절 자체가 아예 없다. 대신 각주로 이렇게 적혀 있다.
Some manuscripts include here: Philip said, “If you believe with all your heart, you may.” The eunuch answered, “I believe that Jesus Christ is the Son of God.” (어떤 사본들에는 다음이 포함되어 있다: 빌립이 말하였다.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세례를 받을 수 있다.” 그 때에 내시가 대답하였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헬라어 비평본: 주석으로 남긴 차이들
그렇다면 원어인 헬라어 신약 성경에서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사실 헬라어 신약 본문(Nestle-Aland NA28, UBS5 등)은 “(없음)”이라는 문구를 쓰지 않는다. 그냥 그 자리에 구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헬라어 비평본은 본문 아래에 비평주(apparatus criticus)를 달아 “이 구절은 어떤 사본에만 있다”라고 기록한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5장 4절은 NA28 본문에는 없지만, apparatus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vers. 4 add. multi mss. (4절은 여러 사본에 추가되어 있음)
즉 헬라어 본문을 직접 보면 “(없음)” 같은 표시는 없고, 구절 자체가 빠져 있는 형태이며, 사본 간 차이는 주석에서 찾아야 한다.
성경 본문에서 어떤 구절이 “(없음)”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빠졌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절들이 성경의 핵심 교리나 복음의 진리에는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빠진 구절들은 대개 다른 복음서나 서신서에서 이미 동일한 진술이 있거나, 신학적으로 독립적 의미를 갖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없음)” 표기를 마주할 때 당황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오랜 시간 신실하게 보존되어 왔는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