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아침 9시에 둘째 날 탐방을 시작했다. 비가 오고 안개가 자욱해서 마음까지 잔뜩 흐린 날이다. 오늘 맨 처음 방문한 곳은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의 생가였다. 카네기는 1835년 이곳 스코틀랜드 던펌린(Dunfermline)에서 태어나서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내고 나중에 자수성가하여 ‘철강왕’이라는 타이틀까지 얻으면서 엄청난 부를 이루게 되었다. 카네기는 “학교는 내게 완벽한 기쁨이었다”라고 말했다.
[2] 특히 가난했던 어린 시절, 무료 도서관을 이용함으로 혜택받은 경험을 기억해서 1881년, 그는 고향 던펌린에 처음으로 도서관을 지어 기증하면서 영국과 미국에 2,500개 이상의 도서관을 건립하는 경이적인 업적을 달성했다. 교육을 위해 도서관이 필수적임을 잘 알고 있는 우리가 볼 때 너무도 위대한 일을 그가 행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또 자선 단체를 건립하여 재산의 4분의 3을 기부하는 믿기 어려운 삶을 실천하기도 했다.
[3] 카네기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카네기의 생가를 둘러보았다. 1층에는 아버지가 수공업을 한 직물 기계가 있고, 2층에는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그 방에서 카네기와 부모님, 그리고 남동생 네 식구가 한방에서 살았다고 한다. 좁은 공간에 침대 하나가 있는 구조를 보면서 당시 여러모로 어려웠을 카네기네 형편을 상상해보았다. 아울러 그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 살았지만, 어떤 꿈을 품고 최선을 다하느냐에 따라서 세계 최고 부호로 우뚝 설 수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4] 아쉬운 점은 비록 그가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 아래 기독교적 배경에서 자랐지만, 정통 기독교 신자로 분류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자신의 큰 꿈을 이루어 세계적인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면 상공한 인생이라 평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다.
카네기 생가를 둘러본 후 성 '앤드류스(St. Andrews) 대학'으로 출발했다.
[5] 이 대학은 600년 이상의 역사와 명성을 자랑하는 영국의 전통적인 명문대학이자, 윌리엄 왕자 부부가 만나서 결혼에 이르게 된 학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순교자 두 사람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한 사람은 '패트릭 해밀톤'이고 다른 한 사람은 '조지 위셔트'이다.
우선 패트릭 해밀톤(Patrick Hamilton)에 대해서 살펴보자면, 그는 스코틀랜드의 귀족이자 종교 개혁가로 1504년경에 태어나 1528년 화형에 처해진 인물이다.
[6] 그는 파리 대학교에서 유학하며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사상을 접했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교회 개혁을 위한 설교와 토론을 시작했다. 1527년, 독일로 도피하여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공개적으로 설파하다가 이단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의 순교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 한 사람인 조지 위셔트(George Wishart) 역시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의 핵심 인물이다.
[7] 그는 칼뱅과 츠빙글리의 사상을 전파하고 교황청의 부패를 비판하며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설교하다가 체포되어 화형당했다. 그의 순교 역시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개신교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설교를 해서 1538년 브레친 주교에 의해 이단으로 기소되었다. 그래서 그는 스위스와 독일로 피신해 칼뱅파와 합류했다. 그 후 154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개혁에 대해 설교를 하면서 추기경과 가톨릭을 비판해 결국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8] 조지 위셔트의 이런 활동들은 가톨릭 성직자들, 특히 스코틀랜드의 추기경 '데이비드 비튼'(David Beaton)의 분노를 샀다. 그 결과 1546년, 보틀 감옥에 잡혀 있던 위셔트를 비튼이 화형시켰다. 당시 사형 집행관이 위셔트에게 개혁에 관한 주장을 철회하라고 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했다.
사형이 집행되던 날 아침, 책임자가 위셔트를 식사에 초대해 그의 주머니에 화약을 넣어 주면서 위셔트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9] 위셔트는 그를 용서를 했다. 시간이 되자 성 밖에서 화형이 집행되었다. 집행관이 그의 몸을 나무 기둥에 묶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를 했다. “오, 세상의 구주이신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늘의 아버지여, 당신의 거룩하신 손에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 그리고 “하늘의 아버지여, 저들의 사악한 마음과 무지와 거짓으로 내게 죄를 지었음을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말이다.
이때 집행관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받았다.
[10] “선생님, 나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당신의 죽음에 대해 아무 죄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때 위셔트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면서 “이것이 내가 당신을 용서하는 내 마음의 징표입니다”라고 하면서 “당신의 임무를 수행하시오!”라고 재촉했다.
이윽고 집행관이 불을 붙였다. 그래서 위셔트는 마침내 순교를 당하고 만다. 그 후 이 사건으로 인해 스코틀랜드 장로회가 시작되었으며, 위셔트의 순교비가 세워졌다.
[11] 존 해밀톤과 조지 위셔트가 순교한 장소엘 일행과 함께 가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은 후 단체 사진을 찍었다. 비가 계속 내리는 데다가, 마침 대학교 졸업식이 열리는 날인 까닭에 길가에 하객들이 많이 지나다녀서 불편한 점이 꽤 많았다.
순교의 피가 서려 있는 현장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존 해밀톤과 조지 위셔트를 기념해서 두 사람의 영어 이름 '이니셜 두 자'('PH' & 'GW')를 현장 땅바닥에 표시해두었다.
[12]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사수하다가 화형당한 성스런 장소라는 걸 잘 모르는 대부분이 아무 생각 없이 그 글자를 발로 밟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내 마음은 슬프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
순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순교자로 받으시길 원하시고, 또한 강력하게 도와주셔야 한다. 비록 순교자로 불러주시지 않았더라도 우리 모두는 살아 있는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 ‘살아 있는 순교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