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소설가 정용준이 쓴 『밑줄과 생각』(작가정신, 2025)이란 책 15~17페이지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어느 날, 그가 택시를 타고 광화문을 지날 때였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추운 날이어서 차가 가다가 서고를 반복하는 동안 운전사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운전사가 '무슨 일하느냐'고 물었다. '공부한다'고 답했더니, '무슨 공부를 하느냐'고 해서 '문학을 공부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대단한 걸 공부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2] “글 쓰는 사람들이 좋은 글을 써줘야 이 세상이 좋아지는 겁니다. 그랬다면 이렇게 사람들이 시위할 일도 촛불 들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먹고살기 바쁜 건 알지만, 다들 책도 안 읽으니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예요.” 그의 말에 작가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작은 소리로 “그러니까요.”라고 답했다. 택시에서 내린 작가는 곰곰이 생각했다.
‘좋은 글을 쓰면 세상이 좋아지는가? 문학이 세상을 좀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는가?’
[3] 약 7년 전쯤, 시카고에서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설교세미나를 한 적이 있었다. 강의 중에 ‘인문 고전’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일간의 강의를 마친 후 한 목회자가 인상 깊은 세미나였다며 자기 교회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못다 한 강의를 특별 개인지도 해달라고 해서 노트북을 펴놓고 새로운 강의를 해주었다. 몇 년 후엔 부흥회를 다녀올 정도로 친해졌는데, 당시 그가 이런 얘기를 했던 것이 기억난다.
[4] 시카고에 책을 많이 읽으면서 독서를 자주 강조하는 목회자가 있는데, 교회는 크지 않고 작다고 했다.
‘독서를 많이 하면 설교가 달라지고 교회가 부흥되어야 하는데, 그 교회 사이즈로 볼 때 독서가 설교의 역량을 키우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는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지 않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최근 인문학에 관한 강의와 저서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한 친구가 있다.
[5] 베스트셀러 저자로 많이 알려진 사람인데, 글도 잘 쓰고 강의도 꽤 잘한다. 매년 두 차례 정도 그 목사 교회에 설교하러 가는데, 교회는 예상만큼 크지 않다. 처음 교회에 도착했을 땐 나 역시 실망한 게 사실이다. 생각만큼 성도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걸 본다면 시카고 목사의 질문처럼, 인문학 독서가 설교나 교회 성장에 반드시 직결되는 건 아님을 알 수 있다.
위에 소개한 운전사의 얘기부터 짚어볼까 한다.
[6] ‘글 쓰는 사람이 좋은 글을 많이 써줘야 세상이 좋아진다’라는 얘기는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인문 고전 같은 양서를 많이 읽고 멋지고 훌륭하게 잘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워렌 버핏이나 스티븐 스필버그나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이들은 돈을 많이 버는 기업인이면서, 자신의 재산 상당 부분을 기부금으로 내어놓는 모범적인 인물들이다. 그건 인문 고전이 가져다준 지대한 영향력이다.
[7] 손흥민 선수가 전 세계 팬들에게 무한 감동을 주는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다 아버지 손웅정 감독 때문이다. 손 감독을 그렇게 만든 것 역시 '독서의 영향'이다. 그는 일 년에 위대한 선현들의 책을 90권씩이나 읽는 사람이다.
물론 좋은 글을 써서 좋은 책들이 쏟아진다 해도 세상이 나빠질 수 있다. 소수의 사람이 권력을 가지고 불법과 부정을 저지른다면 나라 전체가 불행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8] 책에 나오는 위대한 이들의 소중한 교훈들을 읽어서 귀담아듣고, 가슴에 새겨 그대로 행한다면 부정적인 모습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정치인들은 모두 '독서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독서와 관련해서 '설교나 목회'에 관한 주제로 넘어가 보자. 양서를 많이 읽으면 우선 목회자의 인격과 가치관에 긍정적인 변화가 초래된다. 아울러 설교나 목회에 실제로 유익이 되는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다.
[9] 독서를 많이 하게 되면 상상력, 통찰력, 문해력, 문장력, 표현력은 물론이요, 신선한 예증과 예화들을 풍성하게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들리는 설교를 할 수 있게 되고, 성도들과의 친밀한 교제 또한 가능하게 해주는 유익이 있다. 하지만 '탁월한 설교와 부흥'이라는 게 그러한 요소만 갖췄다고 단숨에 효과가 발생되진 않는다. 설교가 두드러지게 달라지고, 진정한 의미의 부흥을 가져오려면 더 많고 깊은 것이 필요하다.
[10] 성경 본문을 파헤칠 때 다른 설교자들이 캐내지 못하는 보화나 산삼을 캐내는, ‘콘텐츠에 있어서의 차별화’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 그것까지 겸비해야 다수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최근 설교와 목회에서 모범적으로 부각되는 목사들과의 교제에서 그들이 가장 갈급해하는 것이 하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콘텐츠에 있어서의 차별화된 그 무엇’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챗GPT와 AI는 설교와 목회 영역에도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11] 보통 설교자들이 작성한 설교의 원고보다 챗GPT나 AI가 만든 원고의 수준이 더 높음을 본다. 원고 작성 속도만 빠른 게 아니라 레벨 또한 비교가 되질 않는다. 또한 기술자가 AI로 잘 만들어낸 설교 영상이 실제 그 사람의 설교보다 더 탁월한 영향을 미치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젠 신학을 하지 않거나 설교학을 배우지 않아도, 문명의 이기만 잘 다룬다면 얼마든지 수준 높은 설교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12] 이러다가 설교자가 없어지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들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때에 여전히 필요한 것은 ‘차별화된 콘텐츠를 지닌 설교자와 목회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위기’는 위태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잘 준비된 이에겐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한다. 차별화된 콘텐츠를 위해 '차별화된 질문을 던지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여전히 '인문 고전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 ‘Readers become leaders.’ 불변의 진리임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