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남을 고치려는 것에 집착합니다. 좋은 만남은 사랑을 위한 것이지 서로를 고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결혼의 목적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창 2:18, 20). 그런데 많은 분들이 결혼 후에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하기 보다 상대를 고치려는 데 집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톨스토이의 명언을 처음 접했을 때 제 자신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은 인간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자기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고치려는 집착은 위험합니다. 집착은 쓰레기를 낳습니다. 집착하면 눈이 어두워집니다. 집착하면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를 극대화시킵니다(마 7:1-5). 집착은 상대방의 아름다움이나 잠재력에 눈을 멀게 만듭니다. 반면에 사랑하면 상대방의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성숙한 사랑은 눈뜸입니다. 성숙한 사랑을 하게 되면 상대방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게 됩니다. 집착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저는 목회 초기와 결혼 초기에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에 집착했습니다. 변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 변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서 좌절했습니다. 변화되지 않은 사람을 볼 때마다 목회에 대한 회의와 설교에 대한 회의를 갖기도 했습니다. 저는 사람이 쉽게 변화될 수 없다는 지극히 단순한 진실을 외면했습니다. 나를 만난 사람은 모두 변화되어야 한다는 잘못된 환상 속에 살았습니다. 그 환상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그 환상 때문에 많은 사람을 힘들게 했습니다.
하나님도 정죄하지 않으시는 성도들을 정죄했습니다(롬 8:1, 8:33-34). 함부로 판단하고, 함부로 오해했습니다. 함부로 비난했습니다. 겉으로는 친절하게 대했지만 내 속에서는 만나는 사람들을 판단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사실입니다. 저는 율법주의자로 살았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을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겉으로 그렇게 표현하지 않아도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안에 쉬지 않고 소리치는 비판의 목소리를 잠재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복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변화하기 어려운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 안에 있는 불안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 안에 있는 불안의 뿌리는 모든 것을 내 생각대로 통제하고 싶은 잘못된 갈망에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 당황합니다. 좌절합니다. 불안해합니다. 자녀가 부모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때 부모는 불안합니다. 심지어 분노합니다. 그 잘못된 분노의 뿌리에는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한다는 통제 집착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통제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통제가 절제가 되고, 통제가 자신을 잘 다스리는 방향으로 발전하면 좋은 것입니다(잠 16:32). 자신을 잘 관리하고, 자신의 감정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생각대로 통제하려는 집착은 위험합니다. 저는 누군가를 고치려는 집착을 내려놓았습니다. 제가 내려놓은 집착은 사람이 변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포기가 아닙니다. 저는 여전히 사람은 변화될 수 있다고 믿고 목회합니다. 성도들의 변화와 성장과 성숙을 믿고 목회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변화시키고 통제하려는 집착은 내려놓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고치려는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깨달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고전 3:7). 또한 모든 사람마다 변화의 때가 있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겨울에는 꽃이 피지 않습니다. 두 살 난 어린아이가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암탉이 품은 계란이 병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썰물의 때와 밀물의 때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제각기 변화의 때가 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을 고치려는 집착 대신에 제 자신을 먼저 변화시키는 일에 집중하기로 선택했습니다. 변화는 하나님께 깊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시작됩니다. 분별은 중요하지만 만나는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사람을 판단하느라 바쁘면, 그들을 사랑할 시간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죄인을 만나도 비아냥거리는 말투를 쓰신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상의 강도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를 사랑으로 품으시고, 그들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변화의 은혜는 통제에 대한 집착이 멈추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내려놓음은 사랑의 끝이 아닙니다. 변화를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사람은 변화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개입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입니다.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변화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성숙한 사랑으로 사람은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함께 하시길 빕니다.
목양실에서 강준민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