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Photo : ) 신성욱 교수

[1] 맥스웰 몰츠 박사는 감동적인 사랑의 사연을 들려준다. 한 남자가 불난 집에서 부모를 구하려다 화상을 입었다. 그의 얼굴은 화상으로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그 고통을 하나님의 벌로 잘못 해석했다. 그는 아무에게도 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사랑하는 아내도 그를 볼 수 없었다. 아내는 성형외과 의사인 몰츠 박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의사는 자신감을 보이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2] “제가 남편의 얼굴을 복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아내는 기뻐하지 않았다. 남편은 일체의 도움을 줄기차게 거부했다. 아내는 남편이 이번에도 거부할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그게 아닙니다. 제 얼굴을 남편처럼 일그러뜨려 주세요! 제가 고통을 나눠 가지면 혹 남편이 저를 다시 자기 삶에 들어오게 해줄지도 몰라요."

[3] 몰츠 박사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여자의 사랑에 깊은 감명을 받아 남편을 찾아갔다. 남자의 방문을 두드리면서 박사는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성형외과 의사입니다. 제가 당신 얼굴을 복원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나오십시오!”
무반응.
“선생님, 제발 나오십시오!”

[4] 역시 대답이 없다. 몰츠 박사는 문밖에서 아내의 제의를 알렸다.
“부인께서 저더러 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려 당신 얼굴처럼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당신 삶에 다시 들어가고 싶어서 말입니다. 부인은 당신을 그만큼 사랑합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아주 천천히 문손잡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남편을 향한 이 아내의 심정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심정이다.

[5] 구원의 확신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 많다. 구원파가 와서 지금 죽으면 천국 갈 자신이 있는지 다그치면 확실하게 대답하는 이들이 드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국 교회 안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20%도 안 된다는 통계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는 바다. 이유가 뭘까? 정말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어서일까? 아니다. 모두가 구원 확신의 근거를 자신에게서 찾기 때문이다.

[6] 현재 자신의 신앙 상태나 체험 여부에 따라서 구원의 확신이 왔다 갔다 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과거 자신이 지은 죄나 지금 짓고 있는 죄 때문에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구원의 확신도 없이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정말 많다.
우리 구원에 관한 확실한 근거를 자신의 신앙 상태나 느낌으로 판단하려 해선 안 된다. 우리 구원의 최종적이고 확정적인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7] 어떤 말씀 말인가?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한 구속의 성취에 우리 구원 확신의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근거가 있단 말이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바라보는 자신의 느낌과 상태에 속지 말아야 한다.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면 부끄럽고 죄스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런 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셨다. 그래서 모진 고초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8] 위에 소개한 화상 입은 남자를 생각해 보라. 자신의 흉한 얼굴을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어서 부인에게까지 마음을 닫아버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자기 얼굴도 남편의 얼굴처럼 흉하게 시술하겠다는 자기 부인의 감동적이고 희생적인 제의에 마침내 남편의 마음이 열리지 않았는가? 물론 그 부인은 제안만 했음에도 남편의 마음이 활짝 열려버렸는데, 다른 한 분은 제안만 하지 않고 실제 실행에 옯기셨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바보 말이다.

[9] 그분은 우리의 일그러진 얼굴을 친히 입으셨다. 죄 많고 허물 많은 우리처럼 되셨다. 가지 말아야 할 곳과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만나셨다. 그분이 살아계실 때 가셨던 곳과 만나셨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라. 높은 직위에 있는 이들이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장소엘 가셨고, 결코 만나지 않았을 사람들을 만나셨다. 마구간, 나병환자촌, 광야. 묘지, 사마리아, 창녀, 죄수, 나병환자, 매국노 세리장, 사마리아 여인 등등.

[10] 잃어버린 자, 죄 많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하면서 자신의 모든 걸 내려놓고 희생하신 분이시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죄와 허물만 바라본 채 ‘일그러진 자화상’을 가지고 바보 같은 삶을 계속 살아갈 텐가, 아니면 날 위해 불가능한 사랑을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이제부터라도 ‘존귀한 자화상’을 가지고 남은 생을 멋지게 잘 살아갈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