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생각’과 ‘사색’의 차이를 아는가? 생각은 ‘보이는 것만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을 의미한다. 시각장애인이 아닌 이상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은 다 보는 게 정상이다. 또한 바쁜 세상에 보고 싶지 않은 것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이들이 바로 ‘생각하는 사람’의 특징을 가진 자들이다.
이와 반면에 사색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을 말한다.
[2]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히 설교자들은 ‘사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색보다는 '검색'을 주로 한다. ‘사색’을 기독교적 용어로 바꾸면 ‘묵상’이 될 것이다. 성경을 읽거나 경건 서적을 한번 읽고는 그걸로 끝내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마음에 와닿거나 유익한 내용들은 계속해서 가슴에 담아두고선 자주자주 생각하고 되새겨야 하는데 말이다. 한마디로 ‘깊이 묵상해야 한다’는 말이다.
[3] 책에 나오는 내용들은 '내 것'이 아니다. 남이 발견하거나 깨달은 지식이나 교훈을 적어둔 것이기 때문이다. 깊은 묵상과 되새김을 통해 자신이 깨닫고 체험한 내용이어야 '권위'와 '생명력'이 있다. 자신에게도 '확신'을 주겠지만, 다른 이에게도 큰 '힘'과 '신뢰'를 준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남이 가르쳐준 진리는 의수요, 의족이요. 의치요. 밀랍이나 남의 살로 만들어 붙인 코처럼 다만 너희에게 붙어 있을 따름이다.
[4] 그러나 자기 자신의 사색으로 얻은 진리는 진짜 손발과 같은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진짜 우리의 것이다.”
세상에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별생각 없이 그저 한 구절씩 읽어나가는 걸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 많다. 적어도 성경을 읽으려면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온전히 파악하려는 자세를 갖고 시작해야 한다. 우리말로 대하는 성경 속에 모순이나 오류가 꽤 많다.
[5] 물론 모순과 오류가 없음에도 이해가 가지 않는 구절 또한 적지 않다. 그렇기에 의문을 가지고 깊이 관찰하고 묵상하면서, 궁금증을 발동해서 해결하려는 자세가 꼭 필요하다. 롬 4:2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한 반면, 약 2:21절에서 야고보는 똑같은 사람인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완벽한 모순이다. 사본상의 오류도 아니고 번역상의 실수도 아니다.
[6] 또 어째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열매의 때가 아님에도 열매 없다는 이유로 저주하셨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여러 학자들의 해석이 나왔지만,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는 구절에서 다 박살이 나고 만다. 제철이 아니었기에 무화과나무의 열매 없음에는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열매 없음을 지적하고자 하시진 않으셨단 말이다. 이런 의문들이 수없이 많음에도 아무 생각 없이 성경을 읽어나가면 되겠는가?
[7] 성경을 읽을 때는 이처럼 깊은 관찰과 묵상을 발휘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위에서 소개한 것과 같은 의문과 질문들이 터져 나옴을 알게 된다. 그런 물음들이 쏟아져 나와야 남들이 깨닫지 못하는 성경의 진수를 알 수 있게 된다. 묵상이나 질문 없이 지나가거나 주석이나 책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과, 자신이 깊이 묵상하고 관찰해서 궁금해하다가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값지고 소중한 것일지 생각해 보라.
[8]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고린도전서를 읽어나가는데,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 내용이 하나 눈에 띄었다. 고전 4:7절의 말씀이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이 구절을 읽고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면 문제가 심각한 줄 알아야 한다.
[9] 무슨 의문일까? ‘네가 아주 많은 걸 받았는데, 어째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하느냐?’라고 되어 있다. ‘네가 어째서 많은 걸 받아놓고선 받지 않은 것처럼 불평하느냐?’라고 해야 의미가 통하지 않는가? 그렇다. 워낙 욕심이 많은 자여서 남에게 많은 걸 받아놓고도 받지 않은 것처럼 불평한다면 쉽게 이해가 되지만,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한다’는 표현은 도무지 말이 되질 않아야 정상이다.
[10] ‘불평하느냐’란 말을 ‘자랑하느냐’로 잘못 번역했나 싶어서 원어를 찾아보는데, 전혀 문제가 없는 번역이었다. 그래서 4장 전체를 계속 읽고 고심을 하다가 19절을 통해서 마침내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19절을 보면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의 교인 중 ‘교만한 자들’을 대상으로 7절의 말씀을 전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때문에 고전 4:7절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의역을 해야 한다.
[11] “누가 너를 다른 사람과 구별했다고 뻐기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으면서 어찌하여 그분께 받은 것이 아니라 네가 잘해서 얻은 것 같이’ 자랑하느냐?”(계 3:18-20, 신 교수 수정역).
바로 이 뜻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놓고선 그분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잘해서 얻은 것 같이 자랑한다’라는 의미였다.
[12] ‘교만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축복임은 놓친 채 자기네가 잘나서 얻은 대가로 자랑했음을 보여준다. 본 구절을 읽다가 말이 되질 않는다는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가는 이들과, 눈치채서 이모저모로 연구하고 묵상한 이들의 깨닫는 바는 천양지차가 될 것이다. 이 본문으로 설교문을 작성한다면 그 설교의 내용 또한 하늘과 땅 차이가 날 것이 불을 보듯 훤하다. 묵상의 중요성을 이제야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