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Photo : ) 신성욱 교수

[1] 『가시고기』라는 소설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저자인 조창인 씨는 이 소설 때문에 일약 유명해진 43살의 작가이다. 그는 다른 일을 하다가 몇 년 전에 소설가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무명작가의 책이 잘 팔릴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소설을 썼다. 소설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결심을 했다.
‘내 소설을 읽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야지.’

[2] 생각하고 아들의 백혈병을 고치기 위해 고생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소설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들의 치료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자신의 눈을 기증하겠다는 장면까지는 글을 썼는데,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가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끝을 맺어야 할지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기도하다가 성경을 펴서 읽고 또 읽었다. 성경 속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내용이 눈에 꽂혔다.

[3] 그 순간 소설의 결론 부분이 떠올랐다. ‘그렇지. 아들을 위해서는 아버지가 죽어야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목숨을 잃는 장면으로 마무리를 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 모두에게 부활이 선물 되었듯이, 자기 아들을 위해서 목숨을 잃은 아버지로 인해 자기 소설도 부활할 줄 믿었다.
출판사에 원고를 제출할 때 만 권만 팔려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4] 그랬던 그 책이 출간돼서 몇 부나 팔렸는지 아는가? 무려 140만 권이나 팔렸다고 한다. 그래서 조창인 작가는 하루아침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아울러 그 소설을 읽는 사람마다 감동받고 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
‘죽으면 산다’라는 말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귀한 이야기이다.

[5] 이 세상에 허무한 죽음도 많지만 소중한 죽음도 적지 않다. 친구를 위해서 대신 죽거나, 자식을 위해서나 남편과 아내를 위해 대신 죽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위대한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그분의 죽음은 그분을 믿는 모든 이들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영벌에서 영생으로 옮기는 능력을 가졌다. 이 얼마나 값지고 귀한 죽음인가? 그러나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삶이 없다는 죽음보다 허망한 것은 없다.

[6] 사후에 또 다른 세계가 없다면 남을 대신해서 죽는 죽음보다 더 어리석고 헛된 죽음은 없을 것이다. 믿는 사람에겐 심판이 있을까 없을까? 우리말 성경은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요 5:24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7] 그런가 하면 히 9:27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한 구절은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하고, 다른 한 구절은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뭐가 옳은 내용일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8] 둘 다 헬라어로 ‘κρίσις’라고 되어 있으나, 문맥에 따라 의미는 전혀 다르다. 믿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라고 했을 때, 그 말은 불신자들이 당해야 할 ‘지옥에 떨어지는 심판’(저주)(condemnation)은 받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신 불신을 막론하고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라고 했을 때, 그 말은 ‘재판’(판결)(trial)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 우리 믿는 자들도 똑같이 재판은 받지만, 불신자들처럼 지옥에 떨어지는 저주의 판결은 받지 않는다.

[9] 재판은 죄가 있기에 벌벌 떨고 기피하는 판결을 의미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씻음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당당하게 고대하는 과정이 그것이다.
죄가 없기에 하루속히 ‘무죄판결’ 받기를 학수고대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수난당하시다가 돌아가신 ‘성금요일 밤’이다.

[10] 과거나 현재에 자신이 존경하는 리더가 남을 위해 고난 당하거나 죽었을 때, '예수 같은 희생의 화신'이라 격찬하는 이들이 늘 있어 왔다.
하지만 그건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표현이 됨을 알자.
그분의 수난과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깊이 느끼고 체험하면서 감사로 충만한 잠을 이루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