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의 요단 계곡에 세 그루의 나무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 세 나무들은 각자 자기의 희망을 이야기 했다. 먼저 첫 번째 나무가 말했다.
"나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의 제단이 되었으면 좋겠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경배하러 오면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될 거야!"
이 말을 하면서 첫 번째 나무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그러자 두 번째 나무가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말했다.
"내 꿈은 사람들을 섬기는 거야. 나는 지중해의 해변으로 가서 커다란 범선이 되어 검푸른 지중해를 가로지르며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배가 되어야지!"
두 번째 나무는 이 말을 하면서 벌써 어깨에 힘이 들어가 의기양양했다. 그때 세 번째 나무가 가지를 쳐들고 이야기 했다.
"나는 혼자 여기에 남고 싶어, 그래서 높게 자란 나를 쳐다보는 사람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찬양하게 하고 싶어. 그리고 뜨거운 여름철에는 피곤한 길손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싶어."
그리고 세월이 흘러 세 그루의 나무가 나름대로 재목으로 쓰일 만큼 성장한 어느 날이었다.
드디어 나무를 베려는 도끼의 날이 첫 번째 나무 밑에 와서 닿았다. 첫 번째 나무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이 되고픈 자기의 꿈이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찬란한 그의 꿈은 깨어지고 첫 번째 나무는 베들레헴 시골의 어느 집 작은 말구유가 되었다. 그 나무는 심한 수치감에 몸을 떨었다.
"내 꿈은 어디로 사라지고 겨우 말먹이나 담는 말구유가 되다니..."
그리고 얼마 후 두 번째 나무도 베어졌다. 그 나무는 자기가 바라는 대로 배를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졌다. 가는 길 내내 두 번째 나무는 콧노래를 부르며 말구유가 되어 사라진 첫 번째 나무를 비웃었다.
그러나 그의 꿈도 허무하게 깨지고 말았다. 큰 범선이 되겠다는 꿈은 간 곳 없고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조그만 비린내 나는 어선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나무는 자신이 그렇게 보잘 것 없고 무명한 존재가 되고 만 것에 대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세 번째 나무도 역시 잘려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다. 세 번 째 나무는 특히나 마음 아팠다. 그 자리에 오랫동안 살아남아서 사람들에게 평화와 자연의 정취를 남겨 주려던 꿈은 이미 포기했지만, 설마 목수들의 손에 의에 죄인을 처형하는 세 개의 십자가 형틀이 될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세 번째 나무는 마치 자신이 천하에 다시 없는 죄인이 된 것만 같아서 절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보잘 것 없는 말구유가 된 것을 불평했던 첫 번째 나무는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아 눕혔던 바로 그 말구유가 됨으로 메시야의 제단이 되었다. 지금까지 어느 성전의 제단도 이와 같은 명예를 얻지는 못했다.
두 번째 나무는 커다란 범선 대신에 아주 작은 고깃배가 되었지만 그 배의 주인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였다. 그는 비록 초라해 보였지만 어느날 예수님께서 타시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심으로써 어떤 범선보다도 더 큰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나무는 비록 죄인을 매다는 십자가가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지금까지도 수 많은 사람들이 그 나무를 본 따서 십자가를 만들고 보고 또 사랑하게 되었다.
이 세 나무는 처음에 소망하던 그 꿈들이 산산이 부서진 것 같으나 하나님은 더 위대하게 쓰임받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꿈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인간의 얄팍한 생각으로는 모든 꿈이 다 이루어진다고는 믿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꿈은 꿈으로 끝나는 것일 뿐 꿈을 이루려 노력하는 것은 헛된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좌절해서는 안된다. 왜냐면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축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기쁨과 평강을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하시고, 우리가 환영하고 인정하고 모셔들인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꿈과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고향에서 몇 대에 걸쳐 이룩한 재산과 친족을 버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머나먼 여행을 떠났다. 아무 것도 잘될 것이라는 확신 없이 떠난 여정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수없이 괴롭혔다.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로부터 이바인 취급을 바으며 정착하지 못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협 속에서 살아야 했다. 심지어 그는 애굽 왕에게 아내마저 빼앗긴 채 두려움과 굶주림에 떨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하난미께서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과, 땅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그는 결국 조카 롯이 족장들에게 사로잡혀 갔을 때, 사병 318명을 이끌고 나아가 전쟁에 승리할 만큼 강한 힘과 재산을 소유한 족장이 되었다. 당시에 사병을 몇 백 명이나 데리고 있었다면 그 일족들과 하인들까지 합하면 족히 천여 명에 이르는 대부족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삭을 낳아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으며, 가나안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역경 속에서도 믿음과 소망을 버리지 않은 결과이리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마음에 품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예수 안에 살면 우리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요 가난한 자 같으나 부유한 자요, 미천한 자 같으나 존귀한 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우리의 삶에 긍지와 자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삶에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의 제단이 되었으면 좋겠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경배하러 오면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될 거야!"
이 말을 하면서 첫 번째 나무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그러자 두 번째 나무가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말했다.
"내 꿈은 사람들을 섬기는 거야. 나는 지중해의 해변으로 가서 커다란 범선이 되어 검푸른 지중해를 가로지르며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배가 되어야지!"
두 번째 나무는 이 말을 하면서 벌써 어깨에 힘이 들어가 의기양양했다. 그때 세 번째 나무가 가지를 쳐들고 이야기 했다.
"나는 혼자 여기에 남고 싶어, 그래서 높게 자란 나를 쳐다보는 사람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찬양하게 하고 싶어. 그리고 뜨거운 여름철에는 피곤한 길손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싶어."
그리고 세월이 흘러 세 그루의 나무가 나름대로 재목으로 쓰일 만큼 성장한 어느 날이었다.
드디어 나무를 베려는 도끼의 날이 첫 번째 나무 밑에 와서 닿았다. 첫 번째 나무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이 되고픈 자기의 꿈이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찬란한 그의 꿈은 깨어지고 첫 번째 나무는 베들레헴 시골의 어느 집 작은 말구유가 되었다. 그 나무는 심한 수치감에 몸을 떨었다.
"내 꿈은 어디로 사라지고 겨우 말먹이나 담는 말구유가 되다니..."
그리고 얼마 후 두 번째 나무도 베어졌다. 그 나무는 자기가 바라는 대로 배를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졌다. 가는 길 내내 두 번째 나무는 콧노래를 부르며 말구유가 되어 사라진 첫 번째 나무를 비웃었다.
그러나 그의 꿈도 허무하게 깨지고 말았다. 큰 범선이 되겠다는 꿈은 간 곳 없고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조그만 비린내 나는 어선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나무는 자신이 그렇게 보잘 것 없고 무명한 존재가 되고 만 것에 대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세 번째 나무도 역시 잘려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다. 세 번 째 나무는 특히나 마음 아팠다. 그 자리에 오랫동안 살아남아서 사람들에게 평화와 자연의 정취를 남겨 주려던 꿈은 이미 포기했지만, 설마 목수들의 손에 의에 죄인을 처형하는 세 개의 십자가 형틀이 될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세 번째 나무는 마치 자신이 천하에 다시 없는 죄인이 된 것만 같아서 절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보잘 것 없는 말구유가 된 것을 불평했던 첫 번째 나무는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아 눕혔던 바로 그 말구유가 됨으로 메시야의 제단이 되었다. 지금까지 어느 성전의 제단도 이와 같은 명예를 얻지는 못했다.
두 번째 나무는 커다란 범선 대신에 아주 작은 고깃배가 되었지만 그 배의 주인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였다. 그는 비록 초라해 보였지만 어느날 예수님께서 타시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심으로써 어떤 범선보다도 더 큰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나무는 비록 죄인을 매다는 십자가가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지금까지도 수 많은 사람들이 그 나무를 본 따서 십자가를 만들고 보고 또 사랑하게 되었다.
이 세 나무는 처음에 소망하던 그 꿈들이 산산이 부서진 것 같으나 하나님은 더 위대하게 쓰임받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꿈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인간의 얄팍한 생각으로는 모든 꿈이 다 이루어진다고는 믿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꿈은 꿈으로 끝나는 것일 뿐 꿈을 이루려 노력하는 것은 헛된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좌절해서는 안된다. 왜냐면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축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기쁨과 평강을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하시고, 우리가 환영하고 인정하고 모셔들인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꿈과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고향에서 몇 대에 걸쳐 이룩한 재산과 친족을 버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머나먼 여행을 떠났다. 아무 것도 잘될 것이라는 확신 없이 떠난 여정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수없이 괴롭혔다.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로부터 이바인 취급을 바으며 정착하지 못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협 속에서 살아야 했다. 심지어 그는 애굽 왕에게 아내마저 빼앗긴 채 두려움과 굶주림에 떨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하난미께서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과, 땅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그는 결국 조카 롯이 족장들에게 사로잡혀 갔을 때, 사병 318명을 이끌고 나아가 전쟁에 승리할 만큼 강한 힘과 재산을 소유한 족장이 되었다. 당시에 사병을 몇 백 명이나 데리고 있었다면 그 일족들과 하인들까지 합하면 족히 천여 명에 이르는 대부족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삭을 낳아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으며, 가나안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역경 속에서도 믿음과 소망을 버리지 않은 결과이리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마음에 품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예수 안에 살면 우리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요 가난한 자 같으나 부유한 자요, 미천한 자 같으나 존귀한 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우리의 삶에 긍지와 자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삶에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남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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