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 있습니다. 처음 한국을 떠나 첫 발을 디딘 곳이 호주 시드니였습니다.

화려한 현대적 이미지는 물론 오랜 전통의 고상한 고전적 이미지 또한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참으로 평화스러운 곳이었습니다. 인위적으로 조성한 가공된 도시에 오랫동안 갇혀 살던 나에게는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를 연상할 만큼 한동안 가는 곳마다 보는 것마다 감동하여 입을 다물 줄 몰랐던 그야말로 지상낙원이라 생각했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지만 가까이 하기 어려웠던 동물 중에 “양무리”를 원 없이 볼 수 있었고 그래서 또한 성경에서 양을 통해 강조하려는 의미와 속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시청각교육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눈부시게 하얀 모래알과 파랗다 못해 손을 넣으면 금세 물들어 버릴 것 같았던 바닷가 해변을 꼽을 수 있습니다.

특히 해변에 노출된 다양한 모습가운데 영화에서나 보았던 “파도타기” 는 가슴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타원형의 널빤지(surfboard)를 타고 몸의 균형을 잡아 가면서 해안 쪽으로 밀려드는 파도 속을 빠져나가는 레저 스포츠의 일종입니다. 아마도 호주 시드니는 지금부터 그 시즌이 시작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보기만 해도 어지러울 만큼 매우 위험천만한 “파도타기”였지만 저들은 오히려 그러한 스릴을 만끽하며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는 훈련이 전혀 안된 맥주병인 반면에 저들은 물과 함께 살다시피 하면서 물의 속성을 알고 물의 흐름을 이용할 줄 아는 기술을 익힌 전문가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훈련을 통해 뛰어난 기술을 가진 유능한 파도타기 선수라 해도 파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즉 파도를 일으키거나 파도의 방향과 높낮이를 조절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파도를 만드는 것은 바다와 바람과 그리고 조수와 기온 등과 같은 자연의 힘에 의해서 파도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는 물론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자연의 파도뿐 아니라 인생의 파도 역시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 수준을 정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마가복음 4장)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중략)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제자들은 기이히 여기며 놀라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41절)"

나름대로 뱃사공 출신의 전문가들이었지만 파도 앞에서 무기력했던 제자들 아직 주님을 정확히 알지 못한 그들의 반응은 무지의 극치였습니다.

파도를 위기의식으로 받아들이면 두려워 낭패를 만나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로 받아들여 잘 타고 넘는다면 반드시 소위 미친바람(광풍)과 같은 시험의 파도, 시련의 파도, 고난의 파도, 환란의 성난 파도조차도 은혜의 파도, 축복의 파도, 성령의 파도, 부흥의 파도로 바뀌어 우리에게 다가 올 것입니다.

파도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이요 선택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내 앞에 밀려올지 모르는 파도를 누구도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내 앞의 파도는 내가 반드시 타야하는 나의 몫입니다.

이제부터라도 파도를 두려워하여 피하거나 넘어지지 말고 부단한 훈련을 통해 기술을 익혀 능숙한 파도타기 선수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갑니다” 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요 찬송이며 간증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