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 초대교회에서의 말씀 집회
본문 : 마 22:37-40
제목 : 참된 교회
종교가 본질에서 이탈될 때 얼마나 해악적인가. 본질에서 벗어난 종교는 백해 무익하다. 요 2장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성전정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겉으로는 경건하다고 하지만 주께서 보실 때 성전은 종교 장사꾼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성전을 그 상태로 만들었던 그 시대 사람들 자신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룩하다고만 생각했다. 이 성전 정화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일대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시기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직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마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정화하는 사건이 다시 한 번 나온다. 공생에 거의 마지막 시기이다. 3년 전에 다 쫓아냈음에도 불구하고 3년 후에도 똑 같은 성전의 상황이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성전 정화 사건으로 시작해서 성전 정화 사건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성전이 뭔가. 교회가 뭔가. 우리 자신들이죠. 오늘날 성전된 우리가 끊임없이 말씀 안에서 우리 자신을 정화시켜나가지 않는다면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겉으로만 화려하고 그런 교회가 참된 교회라면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들이 설 자리는 없어져 버릴 것이다.
본질에 충실한 교회는 그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 사람들이 있을 때 주께서 성육신 하시는 것이죠. 그 사람들 통해서 새롭게 하시는 것이죠.
18세기 교회를 새롭게 했던 사람을 하나 꼽자면 죠지 휘트필드를 들 수 있다. 다른 많은 위대한 업적들을 이룬 자들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개인이었던 이 사람을 교회를 새롭게 하는 데 가장 영향력을 끼친 사람으로 뽑는 이유는 그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 복음에 철저히 충실했기 때문이다. 그는 철저하게 그 복음을 실천한 삶을 살았다. 인간이 하나님 말씀대로 철저하게 살 때 역사하신다.
전세계 수 많은 한인 크리스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이런 것은 그들이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앎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앎이 믿음은 아니다. 그 앎이 삶으로 연결될 때, 함께 어우러질 때 믿음이 되는 것이다.
참된 교회의 여부는 반드시 예배당 밖에서 삶 속에서 드러난다. 내가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
모든 신분의 변화는 그에 알맞은 수준을 요구한다.
모두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알 것이다. 이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난 후 그 신분에 걸맞는 수준에 이르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결혼은 얼마 못 갈 것이다. 반드시 그 신분에 걸맞는 삶을 구현해야 한다.
제가 존경하는 장로가 한 분 계십니다. 60년대 한국에서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는 대학의 총장이셨는데 이 분의 아들이 어느 날 결혼하겠다고 했습니다. 누구라고 하는 데 자기 귀를 의심했다고 합니다. 그 대상이 자기집 식모였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도 안 나온 처녀하고 한국에서 최고 좋은 대학교에서 가장 좋은 학과를 졸업해 장래가 확실한 자기 아들이 결혼한다고 하니… 그래서 한 달 동안 서로 기도하자고 하시고 그래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허락한다고 했답니다. 한 달 동안 이 장로님은 자기 아들이 결혼안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했고 아들은 아버지 마음이 바뀌길 기도했답니다. 한 달이 지나서 물어 보았는데 그래도 마음이 변하지 않아서 결혼을 허락했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이 장로님과 아들이 이 처녀를 교육을 시켰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검정고시부터 대학교 검정고시까지 하나하나 합격하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후에는 아주 덕망받는 현모양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처녀는 결혼이 결정된 후 그 명가의 신분에 걸맞는 수준으로 변하기 위해 자신을 던진 것이죠. 처녀가 그렇게 하지 않고 매일 시아버지와 찬양만 하고 그랬다면 그 결혼은 얼마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공동묘지에서 한 줌도 안 될 것으로 돌아갈 그렇게 끝날 인생인데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로 신분의 변화를 받은 사람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이 새로운 신분을 추구하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닙니까. 문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신분을 노래만 할 뿐 수준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분열하고 싸우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했습니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이 성화의 단계입니다. 걸맞는 수준을 추구하는 것이 성화의 단계입니다. 오늘날 한인교계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이 이 면입니다.
엡 4:13-15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는 그 분에 이르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수준을 끌어올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본문에 율법사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수 많은 계명 중에 어떤 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물었습니다. 이 율법사는 예수님이 어떤 대답을 하던 올무에 빠뜨릴 준비가 되있었습니다. 이 계명이 가장 크다고 하면 그럼 저 계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런식으로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에 이 율법사는 꼼짝 할 수가 없었습니다.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둘째는 그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비중이 같다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때에는 구약 성경 밖에 없었죠. 온 율법은 율법서를 말하는 것이고 선지자는 선지서를 말하는 것이겠죠. 강령이다. 핵심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궁극적인 것이 이것입니다. 그 모든 계명이 다 여기에 포함되는 거죠.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다면 영어 알파벳 중 ‘X’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선이 만나는 곳이 나라고 한다면 위의 길이와 아래의 길이가 똑 같아야죠. 윗부분의 공간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아랫 부분의 공간은 사람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만큼 내가 그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Jesus Christ. 헬라말로는 ‘Xristos’. 하나님을 ‘Ө’, 그리스도를 ‘X’
크리스찬은 ‘X’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아침 해가 왜 떴는가? 나를 위해서. 들판을 걷다가 본 이 꽃은 왜 피었는가? 창세전부터 나를 아시고 내가 이 길을 오늘 걸어가실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하나님과 나와의 이 개인적인 신앙의 경험 없이는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의 하나님에서 끝나 버린다. 나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우리의 하나님으로 나가야 한다. 해가 나만을 위해서 뜨는 줄 알았는데 ‘아! 아니구나. 모두를 위해서 뜨는 것이구나’. 들판의 꽃이 나만을 위해서 피는 줄 알았는 데 ‘아! 아니구나. 모두를 위해서 피는 것이구나’. 내 소유물인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나 만의 주님인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만민의 주님이시구나. 이런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시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 18:1-2)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27:1)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하나님이 내 것입니다. 이 고백속에 여러분과 내가 끼어들 틈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으로만 고백이 끝나버렸다면 우리가 다윗을 기억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 고백이 다음과 같이 승화됩니다.
(시 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시 103:12-14)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나의 하나님을 체험한 만큼 다윗은 우리 하나님의 삶을 살았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보면 너희들이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지 알거든.. 너가 도적이라도. 총각 도적은 자기를 위해서 도적질을 하죠. 결혼한 도적은 자기 자식을 먹일려고 도적질을 합니다.
도적도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지 알거든..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모든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더불어 살아가는 모두에게 ..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 혼자 구원받은 것만 기뻐한다면. 너희는 ‘X’ 의 윗부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밑 부분까지 확대해서 수준을 높이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돌로 쳐죽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사도는 ‘(롬 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처럼 흉측한 사람을 구원하신 것은 내가 주님의 통로가 되어서 모든 사람에게 이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끝과 끝이죠.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극과 극입니다. 사도는 이 끝과 끝을 어우르는 이 범위를 사랑으로 cover 한 것이죠.
주님은 ‘X’의 삶을 살아갈 때 생명을 일으키십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주께서 주신 신분만 노래하고 그 수준을 높이려 하지 않는다. 내 수준을 키운다는 것이 뭔가. 아랫 부분을 윗부분과 같게 한다는 것. 말씀을 공부하던지 무엇을 하던지 내 삶이 주님의 삶을 증거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세상에는 이 윗부분이 전혀 없이도 많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을 박애주의자라고 한다.
16세기 카톨릭에 카스트라토라는 것이 300년 동안 존재했었다. 젊은이들이 성가를 부르는 데 미성의 남자 소년들이 드리는 것이 제일 아름답다고 한다. 근데 문제는 그렇게 열심히 가르쳤는데 이들이 나이가 들면 사춘기로 인해 목소리가 변하는 것이었다. 그 목소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 많은 남자 아이들을 300년동안 교회가 거세해 버린 것이 카스트라토이다. 굉장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람에 대한 사랑은 전무하다. 결국 교황과 주교, 음악지도자들이 듣기 좋으라고 한 행위이다. 남자가 나이가 들어서 목소리가 변하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시겠는가. 그렇게 창조하셨는데..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종교심이 강한 사람들이다. 강한 종교심은 다른 사람을 해친다.
멋진 성당을 짓자. 그래서 바티칸 성당이 지어졌다. 그런데 돈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면죄부를 팔자. 카톨릭 신자들은 성물들을 귀히 여겼다. 그런 여러가지 성물들을 전시해 놓고 돈을 받았다. 너희가 돈을 내면 너희의 죄 값이 하늘에서 50년은 탕감된다. 이런식으로…
많은 기독실업인들이 돈 많이 벌어서 십일조 많이 하면 자기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거지가 아니다. 진정한 기독실업인은 자기 사업장을 통해서 ‘X’의 삶을 구현하는 사람이다. 목사는 목회를 통해서 ‘X’의 삶을 구현하는 것이다. 설교 잘 하는 목사가 좋은 목사가 아니라 ‘X’를 구현하는 목사가 좋은 목사이다. 이것을 매일 점검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무관한 것을 하게 된다. 항상 십계명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성경을 쓰셨죠. 근데 신 9:10에 ‘하나님이 친수로’라고 되어있다. 바로 십계명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쓰셔서 주신 것이다. 이것이 내 수준을 비추는 거울이다. 일계명에서 사계명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비추는 거울이고 오계명에서 십계명은 사람 사랑을 점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울인 계명 중에서 두 계명만 보자.
첫 계명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그럼 어떤 이들은 그럼 다른 신이 있다는 말이네.. 이렇게 이해하면 힘들어지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신관을 보면 제일 먼저는 다신관이 있었습니다. Gods. 흰두교는 600개도 넘는 신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각각의 신들이 통치하는 영역이 매우 좁죠. 그 다음 한 단계 발전한 것이 일신관입니다. A God. 한 민족이 그 민족의 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이 신을 받들자. 이렇게. 통치 영역이 더 넓어졌죠. 오랜 역사적 경험으로 인간이 비로소 알게 된 것이 바로 유일신 사상입니다. The God.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이 홍해죠. 홍해를 가르는 장면. 이집트는 다신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육시키는 것이죠. 바다도 내 장중에 있다. 광야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에서 내려 주시죠. 하늘도 내 장 중에 있다. 반석을 치니 물이 나옵니다. 땅도 내 장 중에 있다. 우주 만물을 총괄하는 나는 유일한 야훼이다.
두 번째 질문 우상 숭배하지 말라. 이를 잘 못 해석해서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종교분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불상의 머리를 잘라놓는다던가 해서…
(출 20:23)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나 여호와의 신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형상을 만드는 순간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생각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사고 속에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속단하면 그것은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영으로 날마다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께서 나만을 사랑하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우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 일이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의 일도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일을 하다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망하는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 이름으로 하니까 무조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중략
본문 : 마 22:37-40
제목 : 참된 교회
종교가 본질에서 이탈될 때 얼마나 해악적인가. 본질에서 벗어난 종교는 백해 무익하다. 요 2장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성전정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겉으로는 경건하다고 하지만 주께서 보실 때 성전은 종교 장사꾼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성전을 그 상태로 만들었던 그 시대 사람들 자신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룩하다고만 생각했다. 이 성전 정화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일대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시기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직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마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정화하는 사건이 다시 한 번 나온다. 공생에 거의 마지막 시기이다. 3년 전에 다 쫓아냈음에도 불구하고 3년 후에도 똑 같은 성전의 상황이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성전 정화 사건으로 시작해서 성전 정화 사건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성전이 뭔가. 교회가 뭔가. 우리 자신들이죠. 오늘날 성전된 우리가 끊임없이 말씀 안에서 우리 자신을 정화시켜나가지 않는다면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겉으로만 화려하고 그런 교회가 참된 교회라면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들이 설 자리는 없어져 버릴 것이다.
본질에 충실한 교회는 그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 사람들이 있을 때 주께서 성육신 하시는 것이죠. 그 사람들 통해서 새롭게 하시는 것이죠.
18세기 교회를 새롭게 했던 사람을 하나 꼽자면 죠지 휘트필드를 들 수 있다. 다른 많은 위대한 업적들을 이룬 자들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개인이었던 이 사람을 교회를 새롭게 하는 데 가장 영향력을 끼친 사람으로 뽑는 이유는 그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 복음에 철저히 충실했기 때문이다. 그는 철저하게 그 복음을 실천한 삶을 살았다. 인간이 하나님 말씀대로 철저하게 살 때 역사하신다.
전세계 수 많은 한인 크리스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이런 것은 그들이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앎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앎이 믿음은 아니다. 그 앎이 삶으로 연결될 때, 함께 어우러질 때 믿음이 되는 것이다.
참된 교회의 여부는 반드시 예배당 밖에서 삶 속에서 드러난다. 내가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
모든 신분의 변화는 그에 알맞은 수준을 요구한다.
모두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알 것이다. 이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난 후 그 신분에 걸맞는 수준에 이르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결혼은 얼마 못 갈 것이다. 반드시 그 신분에 걸맞는 삶을 구현해야 한다.
제가 존경하는 장로가 한 분 계십니다. 60년대 한국에서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는 대학의 총장이셨는데 이 분의 아들이 어느 날 결혼하겠다고 했습니다. 누구라고 하는 데 자기 귀를 의심했다고 합니다. 그 대상이 자기집 식모였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도 안 나온 처녀하고 한국에서 최고 좋은 대학교에서 가장 좋은 학과를 졸업해 장래가 확실한 자기 아들이 결혼한다고 하니… 그래서 한 달 동안 서로 기도하자고 하시고 그래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허락한다고 했답니다. 한 달 동안 이 장로님은 자기 아들이 결혼안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했고 아들은 아버지 마음이 바뀌길 기도했답니다. 한 달이 지나서 물어 보았는데 그래도 마음이 변하지 않아서 결혼을 허락했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이 장로님과 아들이 이 처녀를 교육을 시켰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검정고시부터 대학교 검정고시까지 하나하나 합격하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후에는 아주 덕망받는 현모양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처녀는 결혼이 결정된 후 그 명가의 신분에 걸맞는 수준으로 변하기 위해 자신을 던진 것이죠. 처녀가 그렇게 하지 않고 매일 시아버지와 찬양만 하고 그랬다면 그 결혼은 얼마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공동묘지에서 한 줌도 안 될 것으로 돌아갈 그렇게 끝날 인생인데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로 신분의 변화를 받은 사람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이 새로운 신분을 추구하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닙니까. 문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신분을 노래만 할 뿐 수준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분열하고 싸우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했습니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이 성화의 단계입니다. 걸맞는 수준을 추구하는 것이 성화의 단계입니다. 오늘날 한인교계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이 이 면입니다.
엡 4:13-15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는 그 분에 이르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수준을 끌어올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본문에 율법사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수 많은 계명 중에 어떤 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물었습니다. 이 율법사는 예수님이 어떤 대답을 하던 올무에 빠뜨릴 준비가 되있었습니다. 이 계명이 가장 크다고 하면 그럼 저 계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런식으로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에 이 율법사는 꼼짝 할 수가 없었습니다.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둘째는 그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비중이 같다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때에는 구약 성경 밖에 없었죠. 온 율법은 율법서를 말하는 것이고 선지자는 선지서를 말하는 것이겠죠. 강령이다. 핵심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궁극적인 것이 이것입니다. 그 모든 계명이 다 여기에 포함되는 거죠.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다면 영어 알파벳 중 ‘X’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선이 만나는 곳이 나라고 한다면 위의 길이와 아래의 길이가 똑 같아야죠. 윗부분의 공간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아랫 부분의 공간은 사람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만큼 내가 그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Jesus Christ. 헬라말로는 ‘Xristos’. 하나님을 ‘Ө’, 그리스도를 ‘X’
크리스찬은 ‘X’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아침 해가 왜 떴는가? 나를 위해서. 들판을 걷다가 본 이 꽃은 왜 피었는가? 창세전부터 나를 아시고 내가 이 길을 오늘 걸어가실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하나님과 나와의 이 개인적인 신앙의 경험 없이는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의 하나님에서 끝나 버린다. 나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우리의 하나님으로 나가야 한다. 해가 나만을 위해서 뜨는 줄 알았는데 ‘아! 아니구나. 모두를 위해서 뜨는 것이구나’. 들판의 꽃이 나만을 위해서 피는 줄 알았는 데 ‘아! 아니구나. 모두를 위해서 피는 것이구나’. 내 소유물인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나 만의 주님인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만민의 주님이시구나. 이런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시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 18:1-2)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27:1)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하나님이 내 것입니다. 이 고백속에 여러분과 내가 끼어들 틈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으로만 고백이 끝나버렸다면 우리가 다윗을 기억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 고백이 다음과 같이 승화됩니다.
(시 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시 103:12-14)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나의 하나님을 체험한 만큼 다윗은 우리 하나님의 삶을 살았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보면 너희들이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지 알거든.. 너가 도적이라도. 총각 도적은 자기를 위해서 도적질을 하죠. 결혼한 도적은 자기 자식을 먹일려고 도적질을 합니다.
도적도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지 알거든..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모든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더불어 살아가는 모두에게 ..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 혼자 구원받은 것만 기뻐한다면. 너희는 ‘X’ 의 윗부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밑 부분까지 확대해서 수준을 높이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돌로 쳐죽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사도는 ‘(롬 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처럼 흉측한 사람을 구원하신 것은 내가 주님의 통로가 되어서 모든 사람에게 이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끝과 끝이죠.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극과 극입니다. 사도는 이 끝과 끝을 어우르는 이 범위를 사랑으로 cover 한 것이죠.
주님은 ‘X’의 삶을 살아갈 때 생명을 일으키십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주께서 주신 신분만 노래하고 그 수준을 높이려 하지 않는다. 내 수준을 키운다는 것이 뭔가. 아랫 부분을 윗부분과 같게 한다는 것. 말씀을 공부하던지 무엇을 하던지 내 삶이 주님의 삶을 증거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세상에는 이 윗부분이 전혀 없이도 많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을 박애주의자라고 한다.
16세기 카톨릭에 카스트라토라는 것이 300년 동안 존재했었다. 젊은이들이 성가를 부르는 데 미성의 남자 소년들이 드리는 것이 제일 아름답다고 한다. 근데 문제는 그렇게 열심히 가르쳤는데 이들이 나이가 들면 사춘기로 인해 목소리가 변하는 것이었다. 그 목소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 많은 남자 아이들을 300년동안 교회가 거세해 버린 것이 카스트라토이다. 굉장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람에 대한 사랑은 전무하다. 결국 교황과 주교, 음악지도자들이 듣기 좋으라고 한 행위이다. 남자가 나이가 들어서 목소리가 변하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시겠는가. 그렇게 창조하셨는데..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종교심이 강한 사람들이다. 강한 종교심은 다른 사람을 해친다.
멋진 성당을 짓자. 그래서 바티칸 성당이 지어졌다. 그런데 돈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면죄부를 팔자. 카톨릭 신자들은 성물들을 귀히 여겼다. 그런 여러가지 성물들을 전시해 놓고 돈을 받았다. 너희가 돈을 내면 너희의 죄 값이 하늘에서 50년은 탕감된다. 이런식으로…
많은 기독실업인들이 돈 많이 벌어서 십일조 많이 하면 자기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거지가 아니다. 진정한 기독실업인은 자기 사업장을 통해서 ‘X’의 삶을 구현하는 사람이다. 목사는 목회를 통해서 ‘X’의 삶을 구현하는 것이다. 설교 잘 하는 목사가 좋은 목사가 아니라 ‘X’를 구현하는 목사가 좋은 목사이다. 이것을 매일 점검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무관한 것을 하게 된다. 항상 십계명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성경을 쓰셨죠. 근데 신 9:10에 ‘하나님이 친수로’라고 되어있다. 바로 십계명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쓰셔서 주신 것이다. 이것이 내 수준을 비추는 거울이다. 일계명에서 사계명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비추는 거울이고 오계명에서 십계명은 사람 사랑을 점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울인 계명 중에서 두 계명만 보자.
첫 계명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그럼 어떤 이들은 그럼 다른 신이 있다는 말이네.. 이렇게 이해하면 힘들어지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신관을 보면 제일 먼저는 다신관이 있었습니다. Gods. 흰두교는 600개도 넘는 신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각각의 신들이 통치하는 영역이 매우 좁죠. 그 다음 한 단계 발전한 것이 일신관입니다. A God. 한 민족이 그 민족의 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이 신을 받들자. 이렇게. 통치 영역이 더 넓어졌죠. 오랜 역사적 경험으로 인간이 비로소 알게 된 것이 바로 유일신 사상입니다. The God.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이 홍해죠. 홍해를 가르는 장면. 이집트는 다신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육시키는 것이죠. 바다도 내 장중에 있다. 광야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에서 내려 주시죠. 하늘도 내 장 중에 있다. 반석을 치니 물이 나옵니다. 땅도 내 장 중에 있다. 우주 만물을 총괄하는 나는 유일한 야훼이다.
두 번째 질문 우상 숭배하지 말라. 이를 잘 못 해석해서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종교분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불상의 머리를 잘라놓는다던가 해서…
(출 20:23)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나 여호와의 신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형상을 만드는 순간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생각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사고 속에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속단하면 그것은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영으로 날마다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께서 나만을 사랑하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우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 일이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의 일도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일을 하다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망하는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 이름으로 하니까 무조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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