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주로 혹은 고국으로 이사하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네바다주, 텍사스주, 조지아주 등이 선호 지역입니다. 100년 동안 인구가 꾸준히 늘던 가주가 이제는 인구가 감소할 정도로 이주자가 많아졌습니다. 2020 이후, 약 73만 명의 인구가 가주를 떠났다고 합니다. 4,000만에 육박하던 인구가 줄면서, 가주는 인구가 줄어드는 18개 주에서 감소율이 4위에 속하는 상황입니다.
목회자들이야 이주하는 성도들을 간절히 축복하여 보내지만, 정든 이주자를 보면 마음이 허전해짐을 누를 수 없습니다. 가주에서 주거와 생활비 상승은 이주를 부추기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무숙자의 증가와 치안의 약화로 인한 불안감이 또 다른 이주의 이유일 것입니다. 정치 이념의 편향과 공교육환경의 열악함이 이주의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도시는 일반적으로 강력한 흡인력을 가진 장소입니다. 출근 시간이 되면 도시의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이 모여듭니다. 일터는 새벽부터 일꾼을 부르고, 점심시간에는 넘치는 음식이 공급되며, 저녁에는 즐거운 오락, 문화가 있습니다. 도시에는 매력이 있습니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극장과 영화관, 아름다운 건축물과 박물관, 그리고 거대한 학교와 도서관, 아울러 압도적인 스타디움이 있습니다. 예술과 오락과 스포츠와 학문의 중심지가 축소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시 도시에 필수적인 기능을 상실한 이유로 오는 것은 아닐까요?
성경신학자 메리디스 클라인(Meredith Kline)은 『하나님, 하늘 그리고 집회의 산』(God, Heaven and Har Magedon, 2006)이라는 저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도시의 원형이 “에덴동산”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도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 임하셨고, 주의 영광이 충만한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을 천군 천사로 채우고, 인간을 창조하셔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복 주셨습니다. 하나님-하늘-성전-도시는 에덴의 이미지입니다. 죄악이 없었으면, 하나님의 하늘과 성전과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는 도시는 분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끄 엘륄의 기념비적 저서 『도시의 의미』에서는 도시가 정치, 경제, 문화뿐 아니라 영성의 중심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 이후, 도시 속에는 영성이 부패하였습니다. 오히려 최초의 도시 건축자 가인은 놋 땅에 에녹성을 건설하여 자신의 힘으로 보복의 두려움을 극복하려 합니다. 인간의 능력이 드러나는 도시, 그리고 욕망의 만족과 기술문명이 발전된 도시는, 그러나 영성이 부패한 도시, 가정은 파괴되고 라멕의 살인의 노래를 부르는 세속도시가 되었습니다.
현대도시 또한 거룩한 영성을 상실한 것이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이 타락한 도시 문명을 버리지 않으시고 아들을 보내십니다. 예수께서는 “신의 도성”을 일으키려고 성육신하셨지만, 예루살렘 사람은 자기 왕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문 밖으로 나가서 십자가에 죽입니다.
예수님은 도시를 위하여 우셨고, 성령을 보내어 “여호와 삼마” 곧 “여호와께서 거기 계심”을 이루십니다. 세속도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예수님은 그 피로 자기 백성을 얻고, 에덴의 완성을 위하여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 비전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도시의 개혁자로 세우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니느웨에 가서 전하라” 혹은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두 가지 명령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회개한 도시 니느웨와 장망성 바벨론 사이에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 사이에서 오직 우리 모두는 마음 제단 속 성령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아야 합니다(레 6: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