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스 큰나무교회 김귀보목사
(Photo : ) 김귀보 목사

능력을 잃지 않는 삶
여호수아 23장 1절-16절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목표 지향적이다. 눈에 보이는 목표를 정해주면 더 열심히 한다. 무한정 시간을 주는 것보다 한정된 시간을 정해주는 것이 목표를 성취할 확률이 높다. 일년 안에 20파운드 빼라는 것보다 한 달 안에 20파운드 빼라는 것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다. 자발적으로 하라고 편안하게 해 주는 것보다 상과 벌을 확실히 해서 부담을 줄 때 더 잘한다.

목표 지향적인 삶을 살면 눈에 보이는 성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런데 문제는 목표를 이룬 다음에 위기가 찾아온다.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첫번째는 더 큰 목표를 세우지 않으면 삶의 의미를 상실한다. 더 멀리, 더 높이, 더 많이를 외친다. 두번째는 이룬 목표에 만족해서 더 이상의 도전을 하기 싫어한다. 현실에 안주하는 삶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 정복이라는 큰 목표를 이루었다. 그 다음에 모습이 오늘 말씀에 나온다. 1절을 보자.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쉬게 하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첫번째 주위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쉬게 하셨다. 주위의 적들과 힘겹게 전쟁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두번째, 쉬게 하신지 오랜 후에 편안한 시간이 오래 지속 되었다. 편안한 삶에 익숙해졌다는 말이다. 세번째,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다. 영적 지도자의 부재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것은 영적인 위기가 찾아왔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목표를 이루고 난 뒤에 문제가 생겨버렸다. 4절과 5절을 보자. “4. 보라 내가 요단에서부터 해 지는 쪽 대해까지의 남아 있는 나라들과 이미 멸한 모든 나라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제비 뽑아 너희의 지파에게 기업이 되게 하였느니라. 5.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아내사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분배했다. 그렇다고 전쟁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12지파에게 분배된 땅 안에는 아직 점령하지 못한 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적과의 동거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각 지파들이 계속해서 싸워서 점령해야할 적들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을 분배 받은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적들과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이룬 목표에 만족해 버린 것이다. 더 이상 싸우는 것도 싫고, 불편한 것도 싫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전쟁하는 것이 싫어졌다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이방 부족들과 타협해서 적당히 편하게 살자라고 생각을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목표는 이루었는데, 가나안 땅을 차지한 목적은 상실해 버렸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신 이유는 들어가서 육신적으로 편안하게 살고, 풍요롭고 살고, 즐기면서 살아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다. 가나안 땅은 그런 삶에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려면 이집트 땅이 더 어울린다. “10.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11:10-12)

하나님의 첫마디가 가나안 땅은 이집트 땅과 같이 않다라고 했다. 이집트는 모든 것이 풍족한 땅이다. 나일강이 정기적으로 범람해서 주변의 땅을 옥토로 만들었다. 나일강은 물이 넘쳐나서 발로 수로만 만들어 주면 언제나 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나일강의 풍부한 물은 곡식과 과일을 풍성하게 생산해 냈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어서 모든 수자원들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은 이집트와는 정반대 되는 땅이다. 비가 내리면 땅 속으로 사라져 버려서 늘 물이 부족한 땅이다. 하나님이 적절하게 비와 이슬을 내려주지 않으면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을 얻을 수 없는 땅이다. 양대 문명의 중간에 끼어 있어서 항상 전쟁을 겪을 수 밖에 없는 땅이었다.

이런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풍족하게 살고, 편안하게 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사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다. 이렇게 살려면 이집트에서 살아야 한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할 땅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살아야할 땅이다. 가나안 땅에서 삶의 목표는 이집트에서와 같을 수가 없다.

제가 목사가 되어서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어떻게 되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표라면 목사가 되면 안된다.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 자녀들에게 돈으로 해줄 수 있는 좋은 것을 다 해주는 것이 목표면 목사가 되면 안된다. 돈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목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부요함을 바라고 사는 사람이다. 말씀의 능력을 사모하고 사는 사람이다.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복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믿고 사모하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로를 통해서 주어지는 하늘 나라의 축복을 기대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신 목적이 있다.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19:5-6) 하나님의 목적은 가나안 땅 자체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땅을 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계를 살리는 제사장으로, 세계를 통치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셨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해서 덤으로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목표가 이루어져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내산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광야를 살아갈 때에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든 못하든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몇 만불 이상 벌어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녀들이 축복을 받아 다 잘되어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보더라도 건강해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약해도, 부족해도, 아파도, 고난 속에 있어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설정한 어느 기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일 뿐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최고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목표는 이루었는데,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목적은 상실해 버렸다. 목적을 상실하니까 목표가 변해 버렸다. 7절과 12절이다. “7.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 중에 들어 가지 말라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들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 12.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가까이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서로 왕래하면.” 처음에는 어떻게 하면 가나안 땅의 부족들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까를 고민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난 뒤에는 어떻게 하면 가나안 땅에서 편안하게 살까로 변했다. 정복하고 쫓아내고 싶었던 적들이 이제 따라가고 싶은 대상이 되어 버렸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표가 달라져 버리니까 전혀 함께 할 수 없는 두 가지를 연결하려고 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과 이방문화를 따라 사는 것은 맞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과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맞지 않는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 목표가 되니까 어울리지 않는 이 두 가지를 연결해버렸다. 혼합주의가 일어난 것이다.

<탈기독교시대 교회>라는 책에 보면, 지난 25년 동안 미국에서 신앙생활 하다가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4천 만명이 된다고 이야기 한다. 한국 말로 하면 가나안 성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4천 만명이면 미국 성인 숫자의 15퍼센트 정도 되는 엄청난 놀라운 숫자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이 교회를 이탈한 이유이다. 기독교 문화는 좋지만 일요일엔 교회가고 싶지 않다. 그 시간에 가족끼리 오붓하게 지내고 싶다. 예수님은 믿지만 교회 생활(예배, 성도의 교제, 섬김, 봉사)하는 것은 귀찮다.

주일날 하나님을 예배 하는 것과 예배 드리지 않고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구원 받은 신자로서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고, 섬김과 봉사를 하는 것과 그 모든 것을 귀찮아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목표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혼구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복을 위한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가능한 것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도 자기의 욕구와 행복을 침해 하지 못하게 한다. 주일날은 주의 날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한 날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주말에는 여행을 가야 하니까 목요일 저녁을 주일 예배처럼 드리는 경우들은 이미 등장했다.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목적을 상실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의 능력을 다 잃어버렸다. 9절과 10절을 보자. “9. 이는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까지 너희에게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10.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세상 방식은 눈에 보인다. 세상 방식은 계산이 된다. 그래서 세상 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과 돈이다. 돈이 많은 사람이 이기고, 사람이 많은 쪽이 이긴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은 돈과 사람의 많음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천 명을 상대해서 이기는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것이다.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기는 것이다. 비천한 자가 권세 있는 자를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까지 모든 것이 다 이렇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곳마다 적들이 두려워 떨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와서 이 능력을 잃어버렸다. 왜 잃어버렸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의 능력의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고 능력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기도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에게 기도하라고 해도 못한다. 복음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라고 해도 못 산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능력을 모르는 사람에게 모든 문제에 예수가 그리스도됨을 선포하라고 해도 못한다. 기도의 능력, 예배의 능력, 복음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알면 사용하지 않고 살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해서 가진 것이 더 많아졌다. 삶이 더 풍족해졌다. 더 편해져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은 잃어버렸다. 원수들이 두려워 떨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에는 주변 나라들이 두려워 떨었는데, 이제 주변 나라들이 우습게 여기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구원 받은 우리는 세상의 목표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았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 예수가 그리스도 됨을 선포하고 영적인 전쟁을 하는 영적인 군사로 부름을 받았다.

목적 지향적으로 산다는 것은 목적을 위협하는 것을 제거하면서 사는 것이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목적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제거 해야 한다. 왜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은 적들까지 다 몰아내야 하는가? 더 큰 땅을 차지하고, 더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목적을 방해하는 대적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스스로 절제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가 여호수아 프로젝트를 위해서 기도한다. 그렇다고 여호수아 프로젝트가 우리 교회 존재목적은 아니다. 우리 교회에 존재 목적은 영혼구원이다. 여호수아 프로젝트가 이루어져도 영혼구원을 위해서 살고, 여호수아 프로젝트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영혼구원을 위해서 산다. 여호수아 프로젝트는 영혼 구원을 더 잘하기 위해서 필요한 작은 목표일 뿐이다. 달라스의 부흥을 불을 지피기 위해서 필요한 도구일 뿐이다.

우리는 더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살면 안된다.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면 더 큰 목표를 잡아서 더더더를 외치고 사는 것이 아니다. 또는 하나의 목표를 성취했다고 해서 안주하고 나태하게 사는 것도 우리가 살아갈 삶의 모습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14절-15절을 보자. “14. 보라 나는 오늘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은 마음과 뜻으로 아는 바라. 15.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너희에게 임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모든 불길한 말씀도 너희에게 임하게 하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를 멸절하기까지 하실 것이라.”

우리는 우리 생각대로 살면 망한다. 우리의 목표대로 살면 힘을 다 잃어버린다. 가진 것은 많아지고, 숫자는 많아지고, 삶의 모습은 더 풍성해질지 모른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산다.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은 잃어버린다. 기도의 능력은 잃어버린다. 예배의 능력은 잃어버린다. 마귀를 대적하고, 마귀에게 눌린 영혼들을 살려내는 능력은 다 잃어버린다. 세상과 마귀가 두려워 하지 않은 성도들과 교회들이 되어 버린다. 머리 카락이 잘린 삼손처럼 되어 버린다.

능력은 육신의 편안함 보다는 불편함 가운데 나온다. 불편함을 제거하면 육신의 욕구만 더더더 부각된다. 새벽 기도하는 불편함을 가지고 살길 바란다. 금요일이 되면 기도하러 나오는 불편함을 제거하지 않고 살길 바란다.

그래서 예배의 능력, 기도의 능력을 회복하고 살길 바란다. 한 사람이 천명을 대적하는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고 살길 바란다. 마귀를 대적하고 영혼구원하는 삶을 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