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도다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도, 저주도 다 떠나가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 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찬송은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다니엘 웹스터 휫틀 (Daniel Webster Whittle, 1840-1901) 이 작시한 곡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한 고백은
왜 나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는지 온통 “나는 모른다” 는 고백이 입술에 가득합니다.

왜 하나님은 나를 구속하여주는지? I don’t know…
왜 하나님은 나에게 믿음과 복음을 주셨는지? I don’t know…
왜 하나님은 내 맘을 감동하는지? I don’t know…
왜 하나님은 나를 예수 믿게 하는지? I don’t know…
온통 모른다는 것 투성이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로 다니엘 웹스터 휫틀은 하나님의 은혜를 몰랐을까요?

누군가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했습니다.
다니엘 웹스터 휫틀은 이 곡을 1883년 “복음찬송가’에
“내가 믿은 분을 내가 아내” 란 제목으로 실었었습니다.

내가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긍정을 더욱 더 강조하기 위한
역설적 표현으로 잘 안다고 하는 말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오묘하고 위대하셔서 제한된 범위와 한도 안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생각은 사실상 하나님은혜는
이해범위 밖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너무 크고 위대하여서
알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은 은혜 받은 것만큼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은 은혜 받은 것만큼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신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은 은혜 받은 것만큼
헌금을 많이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쓸데없는 자를 구속하여
굳센 믿음과 복음을 주셔서 내 맘을 항상 편한지요?

왜 하나님께서는 이 쓸데없는 자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내 맘을 감동케 하고 주 예수 믿게 하는지요?

왜 우리에게 이토록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까?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3: 7-11을 통하여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목적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그것은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라고
은혜 받은 목적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일꾼 되는 삶이
은혜를 보답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일꾼이란?
[휘페-르테-스(huperetes)] [아래]를 가리키는 헬라어 인데
[아래]는 배 밑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일꾼은 당시 배 밑에서 노를 젖는 사람을 말합니다.

옛날 배는 노를 저어야 움직이게 되어 있으므로
배 아래서 양쪽으로 노예들이 노를 잡고 북소리에 맞추어 노를 젖습니다.
북소리가 느려지면 천천히 노를 젖고, 북소리가 빨라지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만큼 빠르게 노를 저어야 합니다.
이 노예들은 도망 못 가도록 발이 쇠사슬로 배에 묶여 있습니다.
만약 배가 파선 당하면 배와 함께 물밑으로
수장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생각해보면 비참한 신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주님께서 선장 되신 “주님의 배” 의 일꾼입니다. 그것은 자랑이요 영광입니다.
전에는 마귀의 일꾼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합니다. 바울에게는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기쁘고 영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일꾼의 “꾼”이란 아마츄어가 아니라 프로입니다.
프로는 일 자체가 즐겁고 행복해야 합니다.
일 자체가 즐거움이요, 일 자체가 곧 휴식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대에 살았던 M. Luther는
새로운 신앙의 개혁과 갱신을 외치면서 이런 명상록을 적은 바가 있습니다.

"더 많은 은혜는 우리의 짐이 더 무거워질 때 주어집니다
우리의 수고가 더 커질 때 은혜의 힘도 커집니다.
시험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자비가 증가하고,
고통이 더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도 더 해집니다.
나의 인내의 창고가 꽉 차버리고, 내 힘이 거의 막판에 달하고,
내 자원이 고갈되어 가는 때 하나님의 은혜는 드디어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귀한 은혜를 수없이 체험한 바울 사도의 결국은 …..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는 울타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어두울수록 빛 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려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과 함께 잔치에 참여코자 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금식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과 함께 떡을 나누기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십자가의 수치를 감당코자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은혜 받은 사명자가 필요 합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촛불이 꺼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다른 사람의 초에 불을 붙여 주라."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수록
나 자신이 더욱 성령 충만함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여호와 하나님 사랑할 때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멋진 작품 인생이 될 것입니다.

토스토예프스키는 한때 술주정뱅이였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어떤 상황이 닥쳐도 항상 예수님 편에 서겠습니다."
그런 하나님 사랑으로 <까라마조프 형제들>이라는 명작을 쓸 수 있었습니다.

단테도 하나님 사랑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정말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에게서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 중의 하나인 <신곡>이 탄생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기 능력보다 훨씬 더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은혜는 중단되어서는 안됩니다. 은혜가 중단되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은혜가 떠난 에서나 가롯 유다는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에서가 은혜를 잊으니까 울어도 안되고, 통곡해도 안되고,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장자권과 축복권을 다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가롯 유다에게 은혜가 떠나고
마귀가 역사하니까 예수님을 배반한 악한 일을 한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가
쓸데 없는 자를
쓸데 있는 자로
우리를 만들어 나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미래이고 소망이며 생명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에서 중단되면 절대로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중단되면 곧 불행이 닥칩니다.

우리 모두
주님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는 이 시대에

더 한 은혜를 받기 위하여 “충실한 일꾼” 이 됩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