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가톨릭교회에서 신부 서품(敍品:안수식)을 할 때, 세 가지 서원을 합니다. 첫째는 청빈(淸貧)으로 평생 재산을 갖지 않고, 둘째는 순결로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산다, 셋째는 순명(順命)으로 상위 성직자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매년 초에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 신부, 수(도)사, 수녀 등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사제와 수사, 수녀들은 이 세 가지 서원을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엄숙이 선서합니다.
세 번째 서원인 순명은 자기보다 상위 성직자가 명령을 내려면 이의(異意)를 달 수 없고,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익명의 추기경이 프란치스코 현 교황에 대한 강한 비난이 담긴 글을 올려 가톨릭 교계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2024년 2월 29일 보수 가톨릭 웹사이트 ‘데일리 컴퍼스’에는 ‘데모스 2세’라는 가명으로 ‘바티칸의 내일’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습니다. 이 매체는 어떤 추기경이 다른 추기경들과 주교들의 제안을 취합한 후 작성했다며 보복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자기 실명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익명을 원한 이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점으로 약자에 대한 연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도움 등을 인정하면서, 단점도 똑같이 명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황은 독재적이고, 때로는 보복적으로 보이는 통치 스타일, 법 문제에 대한 부주의, 정중한 의견 차이에 대한 편협함이 단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장 심각한 것은 신앙과 도덕 문제에서 신자들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모호성”이라고 말했습니다. 현 교황인 프란치스코는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가톨릭계에서는 이례적인 개혁파로 불립니다.
교황은 동성애, 피임, 이혼 후 재혼자에 대한 성체성사 허용, 성직자의 독신 의무, 불법 이민 문제 등에 전향적이고, 가톨릭의 식민 지배 가담과 사제의 성추행을 적극적으로 사과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동성 커플에 대한 가톨릭 사제의 축복을 허용해 보수파의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
익명의 추기경은 교황의 개혁 정책이 혼란을 가져왔다고 지적한 뒤 “혼란은 분열과 갈등을 낳는다. 그 결과 오늘날 교회는 최근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분열돼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뒤를 이을 차기 교황은 올곧은 정통주의자이면서 권위주의적이지 않은 통치 스타일의 후보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프란치스코 교황과 정반대의 인물이 차기 교황으로 선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추기경은 “이 기고가 다음 교황청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필요한 대화를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글을 맺었습니다.
현재 추기경 수는 은퇴한 이들을 포함해서 전 세계적으로 224명인데, 현재 80세 미만의 시무 중인 추기경은 137명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많은 추기경 중에 누가 이 글을 썼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이 글은 썼는지 모르지만, 교회의 최고 수장인 교황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순명의 서약을 어긴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절대 순명의 서약을 한 사제가 상위 성직자 특히 교황에게 반기를 든 것은 서약을 어긴 것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가톨릭교회도 2천년 내려오는 세 가지 서약이 흔들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교황이라도 신앙에 위배된다고 여겨지면 항의할 수 있고, 글로 지적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생각에 차이가 있고, 신학적 입장도 다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발표하며 논의할 수 있는 자유와 토론의 장이 보장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 가톨릭교회도 성직의 상하 구조(Hierarchy)와 상위 성직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계율을 철폐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익명으로 교황에게 글을 올리지 말고, 떳떳하게 자기 이름 밝히고, 자기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때가 빨리 와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누구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샬 롬.
L.A.에서 김 인 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