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에서 이해로
여호수아 22장 10절-34절
두개 반지파는 자신들이 약속한 것을 성실하게 지켰다. 형제 지파들이 가나안 땅을 다 차지할 때까지 그들을 떠나지 않았다. 약속한 대로 모든 전쟁에 선봉에 서서 형제들을 위해서 싸웠다. 이제 이별의 시간이 되었다. 7년 간의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로에서 눈물의 작별을 했다. 떠나는 두개 반지파는 자기들을 먼저 배려해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했다. 아홉개 반지파는 두개 반지파가 어려운 시간 동안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준 것에 대해서 감사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형제애의 모습인가?
그런데 두개 반 지파가 요단강 동쪽으로 돌아가자 말자 아홉개 반지파가 갑자기 두개 반지파를 향해서 전쟁을 선언했다. 12절을 보자.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서로를 향해서 감사하고 축복했던 관계가 왜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관계로 바귀었는가?
그 이유가 10절과 11절이다. “10.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제단을 쌓았는데 보기에 큰 제단이었더라. 11.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의 맨 앞쪽 요단 언덕 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제단을 쌓았다 하는지라.” 두 개반 지파가 자기들 땅으로 돌아가서는 요단강 동쪽 편 언덕에 큰 제단을 하나 쌓았다.(장소에 대한 여러가지 주장이 있지만 문맥상으로 보면 동쪽이 맞다고 본다.) 그곳에 눈에 보이는 엄청나게 큰 제단을 쌓았다.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제단을 아무데나 세우지 못하게 했다. 제단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장소에만 세울 수 있었다. “13.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14.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신12:13-14) 하나님이 정해진 장소에만 제단을 세우게 한 것은 우상숭배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있던 우상의 제단을 다 헐고 하나님이 정해준 장소에만 제단을 세워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게 하셨다. 주로 레위인의 성읍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제단을 쌓게 했다. 요단강 뚝은 하나님이 제단을 만들도록 허락한 장소가 아니었다.
두 개 반지파가 요단강 뚝에 제단을 쌓았을 때, 아홉게 반 지파들이 이것을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를 하겠다는 신호로 본 것이다. 그래서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한 것이다.
우상숭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치명적인 재앙과 저주를 임하게 했다. 17절-18절을 보자. “17. 브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회중에 재앙이 내렸으나 오늘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받지 못하였거늘 그 죄악이 우리에게 부족하여서. 18. 오늘 너희가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고 하느냐 너희가 오늘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수22:17-18)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섬기는 축제에 참여해서 우상을 숭배했던 결과로 염병이 임해서 2만4천명이 죽었다.(민25장) 바알브올 사건이다. 이 사건이 있은지 10년도 지나지 않았다.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 아간의 범죄로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36명이 죽었다.(20절) 이런 경험을 한 아홉게 반지파 두 개반 지파의 행동 때문에 자기들이 또 큰 재앙과 저주를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전쟁을 해서라도 우상숭배를 못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것은 아홉개 반지파들의 오해였다. 두개 반지파는 하나님을 더 잘 섬기려는 선한 의도로 제단을 쌓았다. 그런데 오해가 생기니까 이렇게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 모든 갈등과 문제는 오해로부터 시작된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도 하나님에 대한 오해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명령을 오해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고, 죽게 되니까 먹지 말라고 한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누리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니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를 지키기 위한 명령이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선악과를 족쇄로 삼아서 자기들을 종과 노예로 삼으려고 한다고 오해했다. 자기들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싫어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다고 오해했다. 그 오해를 누가 심었나? 바로 뱀(사탄)이 심은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어 절대로 죽지 않는다. 오히려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 처럼 된다. 하나님이 너희들을 속였다.”
성경은 마귀가 지금도 우리 가운데 활동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중간에 이간질 하는 한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관계가 깨어지는지 보았다. 마귀는 모든 관계 속에 오해를 심고 분열을 일으키고, 갈등이 일어나게 한다. 부부간에 오해하게 한다. 부모 자녀간에 오해를 하고 대화를 하지 못하게 한다. 성도들 간에 오해를 하게 해서 성도의 교제를 하지 못하게 한다. 관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을 다 빼앗아 버린다.
마귀(또는 사탄) 이야기를 하면 생소하게 느끼거나, 불편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귀의 존재를 모르고, 마귀가 어떻게 활동을 하는지 모르면 속고 당하게 된다. 모든 것을 다 마귀에게 책임을 전가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문제를 다 마귀가 일으켰다고 하면 안된다. 모든 병을 다 마귀의 짓이다라고 몰아가면 안된다. 감기도, 코로나도, 정신병도, 우울증도 다 마귀 짓이다라고 하면 안된다. 분별을 해야 한다.
병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존재한다. 성경에 보니까 병이들었는데 그 원인이 귀신(마귀의 졸개) 때문인 경우들이 있다.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마12:22) 이 병자는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데 그 이유가 귀신이 들린 것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 귀신을 쫓아내니까 그 병이 나았다. 병의 원인이 귀신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예수님도 병자들을 치료할 때 병의 원인을 따라서 치료하는 방식을 달리하셨다. 손을 얹어서 치료하기도 하셔고, 병을 꾸짖기도 하셨고,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셨고, 죄가 용서받았다고도 하셨다.
불이 나면 집이 다 타버린다. 그런데 불이 난 이유가 있다. 전기 합선으로 자연적으로 불이 났는지? 담배를 피우거나 불을 잘못 다루어서 실수로 불이 났는지? 아니면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또는 범죄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고의로 불을 냈는지? 집이 불탔다고 똑같이 취급하면 안된다. 원인을 밝혀야 한다. 화재의 원을 밝힐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발화점을 찾는 것이다. 어디로부터 불이 시작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집이 다 타서 재가 되어도 발화점은 남는다. 발화점을 확인해서 자연 발화인지 방화인지 밝혀지게 된다. 방화 때문에 불이 났다면 방화범을 잡아야 한다.
그럼 우리가 겪는 문제가 자연적인 것인지, 마귀가 조종하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나? 예수님이 귀신들린 병자를 치료하는 방식을 보면 된다. “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막9:25-26)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아이를 보고 예수님이 말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아이에게서 떠나라고 명령을 하셨다. 그러니까 귀신이 경련을 일으키고 아이에게서 나가니까 아이가 말도 하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아이의 병의 원인은 귀신이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 원인이 귀신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이 명령하셨을 때 반응이 없었을 것이다.
이 원리를 우리 상황에도 똑같이 적용하면 된다. 몸이 아픈데 그것이 마귀가 준 것인지, 몸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알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도하고 치료해야 하는지 약을 먹고 치료해야 하는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대적기도를 보면 드러난다. 귀신이 한 짓이라면 반응이 있을 것이다. 그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쫓아내면 된다. 반응이 없다면 약먹고, 병원 가서 치료 받으면 된다.
두려움, 답답함, 우울함, 걱정, 염려, 무기력, 미움, 증오가 마귀가 주는 것인지 아닌지 논쟁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하고 기도해 보면 된다. 마귀가 저지른 일이라면 반응이 올 것이다. 마귀가 저지른 일이 아니라면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것이다. 그럼 운동하고, 비타민 먹고,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살면 된다.
요즘 독감은 코로나인지 독감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머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콧물도 나고, 몸이 떨리기도 한다. 이걸 가지고 코로나인지 아닌지 싸울 필요가 없다. 테스트기로 테스트 해보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고 기도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고,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마귀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우리 생각으로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한참 서로를 비난하고 정죄하고, 해서는 안될 말까지 쏟아내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다. 그러는 사이에 사탄이 저지른 일은 싹 덮여버린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대적하고 기도해야 그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
왜 마귀 이야기를 하는가? 마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나는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라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문제에 대해서 다 마귀가 했다고 하라는 말이 아니다. 마귀가 얼마나 교묘하게 우리 마음과 생각을 통해서 우리를 속이는지 알고, 속아서 불행을 당하지 말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이기라는 말이다.
아홉게 반지파는 두개반 지파를 오해해서 전쟁을 불사할만큼 분노했다. 그런데 오해하게 하는 것에 속지 않았다. 잘 분별해서 더 유익한 결과를 얻었다. 그 방법이 오늘 말씀에 나온다. 14절과 15절을 보자. “14.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한 지도자씩 열 지도자들을 그와 함께 하게 하니 그들은 각기 그들의 조상들의 가문의 수령으로서 이스라엘 중에서 천부장들이라. 15. 그들이 길르앗 땅에 이르러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아가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노해서 군대부터 보내지 않았다. 대표들을 보냈다. 그리고 두개 반지파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의도를 물었다. 이것이 중요하다. 추측하지 말라. 넘겨짚지 말라. 다른 사람에게 가서 묻지 말라. 그럼 그 사이에서 마귀가 틈타는 것이다. 당사자에게 가서 물어라. 그럼 의도가 드러난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바로 죽음을 선고하지 않으셨다. 아담과 하와를 만나러 찾아가셨다. 의도를 물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질문했을 때 아담의 대답 속에 반역의 의도가 드러났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 그런데 그 의도를 숨기고 핑계를 대고 책임을 전가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다.
오늘 이스라엘 대표들이 물으니까 의도가 드러났다. 두개 반 지파가 쌓은 제단을 번제나 소제 화목제 등 실제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세운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다른 제사를 들림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죄를 짓기 위함이 아니었다. 두개 반지파가 쌓은 제단은 실로에 있는 제단과 똑같은 모형으로 제단을 만든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한다.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24절)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25절)
“너희 자손들이 후일에 우리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다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27절) 실로 있는 똑같은 제단의 모형을 만들어서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다. 우리도 언약백성이다는 것을 증거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28절을 보자. “우리가 말하였거니와 만일 그들이 후일에 우리에게나 우리 후대에게 이같이 말하면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 조상이 지은 여호와의 제단 모형을 보라 이는 번제를 위한 것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한 것도 아니라 오직 우리와 너희 사이에 증거만 되게 할 뿐이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오해가 풀리고 난 뒤에 아홉게 반지파의 반응을 보자. 33절을 보자. “그 일이 이스라엘 자손을 즐겁게 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거주하는 땅에 가서 싸워 그것을 멸하자 하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 오해할 때에는 분노를 해서 죽일 듯이 달려들었는데, 오해가 풀어지니까 두개 반지파의 모습이 너무 은혜롭고, 감사하고, 도전이 되었다.
오해 하는 마음이 생기면 두 가지를 하라. 첫번째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당사자의 말을 들으라. 당사자의 의도와 진심을 확인할 때까지 결론을 내리지 말라. 아홉게 반 지파가 소문을 들었을 때에는 오해를 했다.(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11절) 그런데 당사자에에게 물으니까 이해가 되었다. 이해가 될 뿐 아니라 기쁨이 넘쳤다.
두번째, 하나님께 물으라. 사탄은 오해하게 하고 성령님은 이해하게 하신다. 사탄은 미워하게 하고 성령님은 사랑하게 하신다. 사탄은 정죄하게 하고 성령님은 용서하게 하신다. 그럼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이 사건을 통해서 내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보여달라고 하라. 그럼 성령님이 숨겨진 것을 드러내신다.
사탄이 가장 큰 오해를 하게 하는 분이 누굴까?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과 오해된 채로 지내지 말라. 예배가 막히고, 기도가 막히고, 말씀이 막히고 있으면 회복할 방법이 없다. 사람들과의 오해가 생기면 하나님이 풀어주실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오해가 생기면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하나님과 막힌 것이 있다면 기를 쓰고 회복하라. 그것이 우리의 살길이다. 올해 사람들과 오해가 풀어지고, 하나님과 오해가 풀어져서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한해가 되시길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