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스 큰나무교회 김귀보목사
(Photo : ) 김귀보 목사

여호수아는 우리에게 영원히 시들지 않는 청년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여호수아는 차세대 지도자, 강력한 전쟁 사령관, 비전의 사람, 열정으로 불타는 사람,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우리에게 너무나 생소한 여호수아의 이미지가 나온다. 1절을 보자.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 영원히 청년으로만 있을 것 같았던 여호수아에게도 너무 늙어서 전쟁터에 나갈 수 없는 때가 찾아왔다. 그 다음 말을 주목해 봐야 한다.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 여호수아는 늙어서 더 이상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가나안 지역에는 아직도 정복해야할 땅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대신해서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울 때 여호수아에게 약속한 것이 있다. "2.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수1:2-3)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발바닥으로 밟은 땅을 다 줄 것이라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더 이상 싸울 힘이 없는데,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이 아주 많이 남아 있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여호수아가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여호수아는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전 인생을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에 쏟아 부었다. 그런데도 그 땅을 다 정복하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계획이 얼마나 원대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너무나 원대하기 때문에 특정한 한 사람에 의해서 완성될 수 없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그럼 복의 근원이 되고, 큰 민족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 때에 바로 완성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아브라함이 평생 믿음으로 산 결과가 아들인 이삭 하나 남기는 것으로 끝이 났다. 큰 민족 이루는 약속에 비하면 아브라함이 이룬 것이 너무 작지 않은가? 그런데 결코 작지 않다. 왜냐하면 이삭 하나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삭에서 야곱이 태어나서 그 아들들이 12지파를 이루었다. 야곱에서 요셉이 태어나고 이집트에 가서 말 그대로 큰 민족을 이루었다. 그리고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 땅을 정복했다. 그리고 다윗을 통해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의 근원이 되는 나라를 이루었다. 하나님이 이루려고 하는 큰 계획에 비하면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문제의 대부분은 내가 뭔가를 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내가 이렇게 많이 했는데,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왜 인정해 주지 않고, 대접해 주지 않는가? 이런 생각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시험이 들고, 화가난다. 그런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 일,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너무 작은 일인데, 우리가 한 것이 뭐가 대단하다고 자랑할거리가 되겠는가?

신약성경의 절반을 기록하고, 신약시대의 선교를 대부분 담당했던 바울이 자기가 한 것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내가 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그런 일을 하게 해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일을 했나? 내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나? 내가 얼마나 많이 봉사했나?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게 된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알면 우리가 한 것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4:6)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두 가지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우리의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전 인생을 드렸다. 그런데 그가 이룬 것은 하나님의 큰 계획 중에 아주 작은 한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두번째는 하나님은 우리가 작은 일을 했는데도 정말 큰 일을 한 것처럼 칭찬해 주신다. 작은 일을 맡겨놓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맡긴 것처럼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시고, 도와주시고, 능력을 주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심을 쏟으면 하나님의 크심을 경험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세상에서 권력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세월이다.” 폭군이나,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싶어도 그가 가진 권력이 무서워서 못한다. 그런데 아무리 무서운 권력자도 세월이 흐르면 아무도 밀어내지 않았는데 스스로 물러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세월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청년 여호수아에게도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라는 말을 들을 때가 찾아왔다. 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때가 온 것이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이런 말을 하실 때가 올 것이다. "김목사, 이장로, 최집사 이제 너도 너무 늙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제일 행복한 사람이겠는가?

사도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갇혀 있으면서 자신의 죽음이 임박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이런 고백을 했다.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6-8) 전제는 제물에 향기를 더하기 위해서 붓는 포도주나 곡물주(독주)를 말한다. 전제가 부어졌다는 것은 제물을 태울 준비가 끝났다는 말이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표현을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바울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내가 해야할 일을 다했다. 이제 하나님이 내게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이런 말이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남겼는지 말하지 않았다. 내가 큰 일을 했기 때문에,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상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에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상을 주실 것이라는 말한다.

사도바울은 이 말을 자신의 제자이며, 복음으로 낳은 아들 디모데에게 유언처럼 남겼다. 자신의 삶의 고백이기도 하고, 디모데에게 부탁하는 말이기도 한다. “나는 내가 달려야할 만큼 달려왔다. 이제 니가 그 길을 달려가야한다. 내가 달려왔던 그 길을 니가 대신 달려라.” 이런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도 이제 늙었다고 하실 때, 어떤 인생이 가장 갚진 인생이겠는가? 내가 살았던 삶을 부탁할 수 있는 인생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갚진 인생이다. 내가 살았던 삶을 부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해야 한다.

첫번째 내가 지금 걸어가는 길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이어야 한다. 내가 지금 바른 길을 걸어가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 자녀들에게, 믿음의 후배들에게, 후세대들에게 그 길을 부탁하겠는가? 나처럼만 하나님을 사랑해라. 나처럼만 하나님을 섬겨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두번째는 내가 하는 일이 나의 전 인생을 걸만큼 가치 있는 일이어야 한다. 자기가 가치있게 여기지 않는 일을 어떻게 자신의 자녀들에게, 후배들에게 살아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의 전 인생을 걸고 난 뒤에 후회하지 않는 일은 복음 전하고 영혼을 살리는 일 밖에 없다. 성공, 명예, 돈을 위해서 인생을 걸면 후회를 끝나게 된다.

세번째는 내가 평소에 믿음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나는 돈 앞에 벌벌 떠는 모습을 보여주고, 불신앙으로 불평하고, 어려움 앞에 굴복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어떻게 자녀들에게 믿음의 삶을 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제 여호수아는 나이가 많아서 늙었고, 정복해야 할 땅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여호수아를 이을 걸출한 지도자를 세워서 그 남은 땅을 정복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신다. 7절을 보자. “너는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 하셨더라." 두개 반 지파는 요단강 동쪽에서 이미 땅을 받았기 때문에 아홉게 반지파에게 땅을 나누라고 한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땅을 다 정복하고 난 다음에 분배하는 것이 맞는 순서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복되지도 않은 땅을 각 지파에게 분배를 해 주라고 명령을 했다.

지금 하나님은 패러다임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지금까지는 한 사람의 걸출한 지도자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서 전체를 이끌어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모세가 그렇게 했고, 그를 이어서 여호수아가 그렇게 했다. 그럼 그 다음을 잇는 지도자를 세워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땅을 12개로 나누어서 각 지파별로 정복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왜 패러다임을 바꾸셨을까? 첫번째는 가나안 땅의 강력한 적은 이미 굴복시켰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적은 각 지파가 스스로 정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한 곳에 모여서 생활하던 광야생활과는 다르게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 지파별로 흩어져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각 지파에서 영적인 지도자가 나와서 그 지파를 이끌어야 한다. 그것을 할 수 있도록 레위지파를 흩어서 각 지파의 영적인 일을 돕도록 했다.

여기에 영적인 원리가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탄의 권세를 다 꺾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주셔서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우리 스스로 싸우도록 하셨다. 우리가 마주 대하는 사탄은 권세가 꺾인 사탄이다. 우리가 겪는 문제와 사건은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너질 문제들이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싸워 이겨야 한다.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셔서 영적인 싸움을 돕도록 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가지고 싸우려고 할 때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지파별로 나누어서 땅을 정복하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6절에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정복하시겠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또 레바논에서부터 미스르봇마임까지 산지의 모든 주민 곧 모든 시돈 사람의 땅이라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내가 명령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 이 말씀은 여호수아에게 “내 발바닥으로 밟는 땅을 다 너에게 주실 것이다.”라는 약속과 버금가는 약속이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했듯이, 이 약속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그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만 있으면 영적인 지도자는 언제든지 나온다. 모세도 이런 과정에서 나온 인물이고, 여호수아도 그런 과정에서 나온 인물이다. 실제로 유다지파에서는 그런 인물이 나왔다. 바로 옷니엘이라는 인물이다.

옷니엘은 갈렙의 사위이자 첫번째 사사가 되는 사람이다. "16.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17.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함으로 갈렙이 자기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수15:16-17) 갈렙은 45년 전에 여호수아와 함께 믿음의 고백을 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45년이 지난 다음 85세의 나이에도 그 비전을 잃지 않고 헤브론(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을 자기에게 달라고 해서 정복한 사람이다. 갈렙이 헤브론을 점령하고 난 다음에 믿음의 도전을 했다. 기럇 세벨을 점령하면 내 딸을 아내로 주겠다. 그 도전 앞에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이 바로 옷니엘이다. 믿음으로 도전하는 사람과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곳에서 영적인 지도자가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파 속에서는 이런 영적인 지도자들이 나오지 못했다. 왜 그럴까? 믿음의 도전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가나안 땅이 주는 풍요로움에 안주해버렸기 때문에 그렇다.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 버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종목표는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한 첫 발판에 불과했다.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을 발판 삼아 진짜 하나님의 일을 해야하했다. 우리 이민자들에게 미국 땅에서 정착하고 먹고사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목표다. 이 목표를 상실하면 먹고 사는 것에만 묶여 있다가 늙고 병들어서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지금도 현실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가 이것이다. 복음을 깨달은 우리가, 말씀의 능력을 아는 우리가 복음과 말씀의 능력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삶을 살아라는 것이다. 현실의 문제를 말씀과 기도로 이기는 삶을 살아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땅을 분배해 주면서 믿음으로 정복할 사람들이 일어나듯이, 우리 속에 수많은 영적인 사람들이 일어나야 한다. 말씀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일어나야 한다. 복음과 말씀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답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일어나야 한다. 달라스와 미국을 넘어서 영적인 흐름을 주도해 가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120명의 기도꾼들이 필요하다.

이것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구체적으로 기도하라. “하나님 내가 복음을 전할 일이 생기도록 해주세요. 내가 복음으로 살릴 영혼을 붙여주세요. 하나님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 일을 내게 주십시오.” 영혼 살리는 것이 나의 소원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내 바램이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통해서 그 일을 하게 하신다. 여러분을 통해서 한 영혼이 주님 앞에서 세워지는 역사가 있길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