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유철 목사
진유철 목사

사람이란 항상 “더 좋은 것”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지금 옷도 입을만한데 왜 새 옷을 사려고 합니까? 지금 쓰는 물건도 아직 잘 쓸 수 있는데 왜 새 제품에 관심이 갑니까? 사람에겐 “더 좋은 것”을 향해 가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을 붙들게 되면 이전 것들은 과감히 정리하거나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더 좋은 하늘나라”를 보는 눈을 떴기 때문에 십자가를 참고 이기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우리도 세상이 주는 유혹과 문제에 무너지지 않고 원수마귀를 이겨야하는데 그러려면 예수님처럼 “더 좋은 것”을 보는 눈을 떠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이 누릴 수 있는 “더 좋은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과 함께 할 때만이 죄의 용서가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저주와 가난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나의 연약함과 무능력을 이기는 하늘의 능력이 임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세상이 주는 미움과 원망이 떠나가고 감사가 임합니다. 육체를 가졌기에 다가오는 질병을 이기고 치료와 소망의 삶을 삽니다.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사망을 이기는 부활과 영생을 보는 눈이 뜨이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좋은 진짜”라는 것입니다.

‘윌리암 텔의 사과이야기’라는 유명한 희곡이 있습니다. 14세기 초엽으로 스위스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식민지 였습니다. 오스트리아 총독인 ‘게슬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야만성을 띄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길가에 높은 나무막대기 위에 오스트리아 왕을 상징하는 모자를 걸어 놓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절을 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때마침 강한 사냥꾼 ‘윌리암 텔’이 여섯 살 난 아들을 데리고 그 앞을 지나치면서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이의 머리 위에 사과를 얹고 텔로 하여금 활을 쏘게 했습니다. 활을 잘 쏘는 그였지만, 아이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마 아들을 향해 활을 당길 수 없었던 윌리엄은 몇 번인가를 망설이고 망설인 후에 화살을 활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들어 아들을 보는데 그 때 아들은 아빠를 믿고 편안하고 밝은 표정의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윌리엄은 활을 들어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활을 당겼습니다.

A depiction of the apple-shot scene in Sebastian Münster's Cosmographia (1554 edition).
(Photo : wikipedia.org) A depiction of the apple-shot scene in Sebastian Münster's Cosmographia (1554 edition).

화살은 활시위를 떠나 정확히 사과의 한 가운데에 명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며 압제받는 조국을 폭군의 지배에서 해방시킨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양궁 시합 점수로 말한다면 ‘윌리암 텔’이 쏜 화살은 정확히 10점 과녁에 맞힌 것이었습니다. 만약 9점이나 8점에 맞혔다면, 그것은 아들의 죽음을 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생명에 관한 문제일 때는 최선이어야지 차선이라도 최악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진짜를 보려고 할 때는 비슷한 것이 가장 위험합니다. 생명의 문제는 8점이나 9점의 과녁과 같은 비슷한 신앙이 되면 안 됩니다. 오직 진짜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 충만의 은혜로 진짜를 보는 눈을 뜨고 2024년을 살게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