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겉과 속
여호수아 6장 15절-27절
여호수아의 지휘 하에 견고한 여리고 성이 함락되었다. 그것도 아무런 전력손실 없이 무혈입성을 했다. 이것을 지켜본 가나안 땅의 대적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요단강 도하를 통해서 높아진 여호수아의 명성은, 여리고까지 무너뜨리자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27절을 보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여리고성의 승리는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적들에게도 명백한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아무리 견고한 성도 무너뜨릴 수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아무리 강한 적도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지키신 것이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1:5)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 인생에 어떤 대적도 우리를 당할 자가 없다. 모든 문제와 사건 속에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는 너무나 중요한 메시지다.
그런데 여리고성 전투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승리하다는 메시지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메시지들이 담겨져 있다. 하나님이 여리고성 전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려고 했던 것은 전쟁의 승리만이 아니었다. 단지 이기고, 승리한 것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가 여리고성 전투에 담겨져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광야를 지나올 때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을 백성들의 기대와는 좀 다른 부분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표는 빨리 크고 두려운 광야의 어려움을 벗어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도가 있으셨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하나님이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내려 주신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진리를 배우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진리는 광야에서 필요한 진리가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진리다. 광야에서는 어차피 하나님이 매일 만나를 내려 주시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은 먹을 것이 넘쳐나는 땅이다. 내가 노력하면 내 힘으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땅이다.
이런 풍요로운 가나안 땅을 살아갈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진리”를 배우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살아간다. 먹을 것을 얻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 살아간다. 결국은 먹을 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한 목적을 상실해 버리게 된다. 가나안 땅에서 잘 먹고는 살겠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고 사는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도 광야를 빨리 벗어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 싶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과 불편함을 빨리 해결해 주길 바라고, 우리의 인생을 탄탄대로 인도해주시길 바란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가장 빠른 시간에 얻기를 바란다.
반면에,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의 삶에 승리를 주시는 것이다. 고통과 불편함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길 원하신다. 문제와 사건을 만날 때마다 세상 방식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이기길 원하신다. 문제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고 살아서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길 원하신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경험하길 원하신다.
이 진리를 체험해야 우리가 세상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갈 수 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우리의 삶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 건져내어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를 옮기신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고 사는 삶이다.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고 살아가는 삶이다. 이런 삶을 위해서 시간과 돈을 써도 아깝지 않고 기쁨이 느끼지는 삶이다. 이런 기쁨으로 여러분의 인생이 풍성해지길 축복한다. 이런 삶이 기쁘지 않으면 우리는 이미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여리고성 전투에는 승리를 넘어서 방향을 잃지 않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들어 있다. 첫번째는 인생의 지휘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표현하면 왕의 자리, 주인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왕의 자리, 주인의 자리를 내어 놓아라고 하는 걸까?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수3:4)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처음 가보는 낯선 길이다. 그런데 길을 모르는 내가 내 인생의 안내자가 되면 망한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인도자가 되시겠다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앞서 가시고, 미리 가서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여리고성 전투를 할 때 여호수아가 지휘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을 때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만약, 여호수아가 사령관이 되어서 지휘를 했다면 자기의 지혜를 짜내어서 뛰어난 전술과 전략을 발휘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수많은 병사들을 희생시켰을 것이다.
인생의 문제와 사건을 어떻게 이기는지 모르는 우리가 인생의 주인이 되면 안된다.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이기고 해결하신 우리 주님이 주인이 되어야 인생의 문제를 이길 수 있다.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우리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야 우리가 길을 잃지 않는다.
실제로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는 것은 어떤 삶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말씀이 우리 안에 깊이 들어와서 그 말씀이 사람들의 말보다, 내 생각보다, 세상의 가치관 보다 더 중요하게 되는 것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말씀이 주인 됨과 동시에 그 말씀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힘이 되고, 능력을 준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것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리고성 전투를 하면서 중요한 명령을 내렸다. 18절과 19절을 보자. “18.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19.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 여리고성 안에 얼마나 많은 금은 보화가 있었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들을 하나도 손대지 말고 다 하나님께 받치라고 하셨다. 불에 타는 것은 다 태워서 없애고, 타지 않은 은금과 동철은 하나님께 바쳐라고 했다. 어떤 것도 손대지 말라는 말이다.
주인과 청지기의 차이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에 달려 있다. 주인은 모든 것을 자기 임의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청지기는 주인이 허락한 것만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손댈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주인이다. 자기가 손대지 못하는 영역이 있으면 청지기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의 모든 것을 아담에게 다 일임하셨다. 그런데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못하게 하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아담이 손대지 못하는 영역이다. 보디발은 요셉에게 모든 것을 다 허락하면서도 자기 아내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이 손대지 못하는 영역이다.
모든 인간과 피조물은 하나님께 구별된 영역이 존재할 때, 다시 말하면 자기 스스로 손댈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할 때 안전하다. 하나님의 축복을 놓치지 않는다. 천사 루시퍼는 이 영역을 침범해서 하나님이 주신 영광과 존귀의 자리를 잃어버렸다. 아담은 이 영역을 침범해서 에덴동산에 쫓겨나고 하나님의 주신 복을 다 잃어버렸다.
우리 인생이 복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손댈 수 없는 구별된 영역이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절기와 제사와 십일조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한 이유가 이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말3:8)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내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어야 한다. 내가 손대지 못하는 영역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십일조와 예배이다. 우리가 십일조와 예배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십일조와 예배가 우리를 살리고 지킨다.
마지막으로 봐야할 장면이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는 모습이다. 22절을 보자.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하나님이 여리고성 공격명령을 내리면서 중요하게 챙긴 사람이 라합이다. 라합은 멸망 받을 땅에 있는 사람이었다. 보잘 것 없는 여인이었다. 여리고성을 점령하는 대단한 일에 이 여인과 한 약속이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겠나? 점령군이 들어가서 다 죽여버린다고 한들 이 여인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이 보잘 것 없는 여인이 한 믿음의 고백을 기억하고 그 약속을 지켜주셨다. 사람들은 약속을 하고도 잊어버리기도 한다. 때론 알면서도 자기의 욕심 때문에 그 약속을 무시해버리기도 한다. 때로는 약속을 지키고 싶어도 능력이 없어서 지키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믿음의 고백을 절대로 잊지 않으신다. 비천한 사람의 고백이라고 무시하지 않으신다. 세리가 성전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하늘을 향해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나는 죄인입니다. 불쌍해 여겨주십시오.”라는 고백을 들으시고 의롭다고 해주셨다. 소년 다윗의 믿음의 고백을 들으시고, 골리앗을 무너뜨려 주셨다.
하나님은 라합의 믿음의 고백을 들으셨을 뿐만 가족을 구원해 주셨다. 라합은 나중에 살몬과 결혼하여서 보아스를 낳는다. 이 가문은 다윗의 가문이고, 예수님의 가문이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마1:5)
하나님을 우리 인생에 왕과 주인으로 모시고 드리는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하나님은 반드시 들으신다. 새벽기도에 나와서, 금요 능력 기도회에 나와서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신다. 교회에 나와서, 골방에서 하는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이 들으신다.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은 목표는 승리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승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승리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여리고성 전투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 실행되는 현장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현장이었다.
우리의 매일의 삶은 여리고성 같은 전투의 현장이다. 매일 매일 삶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라.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