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지도자의 외교술, 이념이나 소설 아닌 현실에 입각해야
경제·국방 모두 美 절대 의존, 적극 협력만이 번영·안보의 길
한국 진보 정치 지도자들 외교, 김진명식 대체역사 수준 그쳐
윤석열 대통령 방미 책무, 전 정권 외교·경제 실책 바로잡기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방미 일정에서 거둔 외교적 성과를 두고 여러 전문가들이 설왕설래하고 있다. 논평자들 각자의 정치적 진영을 반영하듯 찬사와 비판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형국이다.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정치적 진영논리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과 이익 보전을 위해 혹세무민하는 일부 기독교계 인사들을 제외한다면, 기독교인들 대다수는 힘써 신앙생활에 몰두할 수 있게 국정을 운영하면서 자유민주주의 가치(특히 종교적 자유)를 보장해주는 정치지도자로 만족한다.

애초 정치란 대중이 지닌 자원에 대한 욕망을 다루는 기술이다. 특히나 국제정치는 더욱 냉혹해서, 오로지 힘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그나마 기독교적 인간 이해와 계몽주의적 합리성을 정치 이념의 근간으로 삼는 미국 정도 되니까 순화된 제국주의 정책을 펼치는 것이다.

만일 한반도 전체가 중국이나 러시아의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제국주의에 지배된 나라였다면, 현재 대한민국은 어떤 상황에 이르렀을까? 당장 북한의 현실을 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기본적으로 러시아는 그 광활한 영토와 혹독한 자연환경, 수도 없이 다양한 민족들을 지배하고 감당하려다 보니 인간성이 마비된, 그저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정치문화가 자리잡게 되었다.

이것은 단지 현재 푸틴의 러시아나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 중세 시절 키예프 공국, 그리고 근대 로마노프 황가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이다. 여기에는 시베리아 지역에 거주했던 수많은 유목 민족들의 처량하고도 서글픈 생존을 위한 비인간적 삶의 양식들 또한 한 몫을 하고 있다.

중국은 러시아에 비해 자연환경은 훨씬 온화한 감이 있으나, 역시 수많은 민족, 세력, 군벌들이 모여 투쟁하던 각축전 전통이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왔다.

게다가 오랜 세월 중국의 정치적 근본 이념으로 자리잡았던 유교는 애초 인간의 평등을 인정하지 않는다. 각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인(仁)을 이룰 가능성이 일정 부분 정해져 있고, 그 가운데 선천적으로 인을 이룰 가능성이 큰 군자(君子), 대인(大人)들이 당연히 부와 권력을 손에 쥐어야 한다는 신념을 전한다.

이런 정치 신념은 러시아와 중국의 외교 정책에 그대로 전이된다. 러시아는 주변국을 자기 이익을 위한 팻감으로 삼고 식민화하거나 착취하는 데 능하다. 

윤석열 바이든
▲윤석열·바이든 대통령이 확대 정상회담을 갖고 있다. ⓒ대통령실

폴란드가 우크라이나 전쟁 후 왜 그리 급하게 한국무기 수입을 서둘렀을까? 한국의 방위산업이 일취월장해서? 분명 그것도 하나의 요인이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하나만으로 만족할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1939)으로 독일과 폴란드를 반으로 갈라먹는 짓을 서슴없이 자행했던 나라가 러시아다.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다.

중국은 중국대로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주변국을 오랑캐, 열등 민족 취급하는 태도가 수천 년 이어져 왔다. 말이 좋아 중화사상이지,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실상 히틀러의 아리안 민족주의와 내용상 크게 다를 것도 없다.

히틀러의 레벤스라움이라는 이념과 현재 중국이 강조하는 하나된 중국 이념, 그 본질은 결국 민족의 우열을 나누는 편협한 자국민 중심주의가 외교안보적으로 구현된 것에 불과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 의회에서 연설한 내용의 핵심, 미국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생목숨을 바쳐가며 함께 싸운 맹방이라는 메시지는 바로 이와 같은 중국과 러시아의 비인간적인 정치, 외교전통에 대한 이해를 그 배경에 깔고 있다.

권력의 확보와 확장, 유지를 위해 남북한 합쳐 민간인만 250만 명이 사망하는 전쟁을 벌인 김일성의 성정은 한반도에 러시아와 중국의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정치이념을 가장 잘 체현할 수 있는 그릇과도 같았다. 

윤석열 바이든
▲윤석열·바이든 대통령이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대통령실

오늘날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고질적 안보 위협은 혹자들이 음모론적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미국의 책임이 아니다. 애초 러시아, 중국, 그리고 북한의 인성 마비된 지도자들이 숫자놀이하듯 전쟁을 일으키고 무수한 사상자를 발생시킨 결과이다. 

우리는 통상 일제강점기 35년이 지옥과 같았던 것처럼 인식하지만, 그 지옥 같았던 시기 일제에 의해 희생된 무고한 사상자 수는 저 세 공산 독재국가들이 3년 간 전쟁으로 발생시킨 사상자 수에 비하면 말 그대로 조족지혈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위협의 본질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된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 대한민국이 2000년대 이후 경제력·문화력·국방력 부문에서 이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수준의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대한민국이 미국의 다른 동맹인 일본이나 나토 수준의 국방력을 갖춘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일본이나 나토 역시 제대로 된 전면전을 수행하려면 미국의 군사력을 중심에 두고 군을 운용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경제상황 역시 마찬가지이다. 2003년 이후 20년 동안 중국이 한국의 최대 교역국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이는 미국과 서방이 중국에게 '세계의 공장' 지위를 잠정적으로 허락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국에 대한 무역의존도가 크기는 하지만, 한국이 중국에 수출하는 상품과 서비스의 상당 부분은 결국 미국과 서방으로 전해지는 상품의 제조를 위해 쓰여진다.

이처럼 국가 운영의 근본이 되는 경제와 국방 양 측면에서 궁극적으로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미국의 경제와 외교안보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번영과 안보의 길이다. 애초 이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윤석열 바이든
▲4월 25일 워싱턴 D.C. 리츠 칼튼 호텔에서 개최된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오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참전용사의 휠체어를 밀어주고 있다. ⓒ대통령실

일부 진보 진영 논객들이 중국과 북한과의 친교가 민족의 살 길이라고 외치는 소리는 산수 수준의 현실감각도 없는 이들이 논하는 공허한 이념적 교설에 불과하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그렇게 대의명분에 집착하고 실리에 어두운 이들에게 정권을 내주고 고통받았던 우리 민족이 근대화·산업화를 달성한 오늘날에까지 이념 중심의 비현실적 국정운영을 하자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북핵 위협이 있으니 북한과 친해야 한다는 주장, 그 주장을 20년 동안 믿고 추진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와 북한 공산당 측(특히 김여정)의 무자비한 폭언이었다.

양치기 소년 일화도 세 번째 거짓말에는 사람들이 신뢰를 잃었는데, 대한민국의 진보 진영은 세 번은커녕 수십, 수백 번의 배신을 당하고도 계속 북한 정치 지도자들에게 아낌없는 신뢰를 내보이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맹신의 소치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미국의 외교·경제노선에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는 것도 옳은 태도는 아닐 것이다. 미국 역시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필요할 때는 외교적으로 상대방을 배신하거나 위압하는 일을 여러 차례 자행해 왔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미국의 엘리트 정치지도자들이 3만 7천여 미국 청년들의 목숨을 매몰시키면서 지켜낸 한국 내 미국의 경제적·문화적·군사적 영향력을 내팽개치는 정치적 자살을 감행할 리 만무하다.

애초 미국과 외교관계가 그리 밀접하지도 않았고 미국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미국이 비교적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당연한 일이다.

그나마 러시아의 패권주의적 확장 정책과 침략을 규탄한다는 의미에서 현재 수준의 도움을 주는 것만으로도 미국은 허용된 수준 안에서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최선의 힘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바이든
▲4월 25일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바이든 대통령 부부와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이름을 보고 있다. ⓒ대통령실

대한민국의 경제적·군사적 성장은 냉전 시기 미국 외교정책과 군사력의 승리를 보여주는 증표나 다름이 없다. 게다가 미국이 전수한 대의민주주의와 자유 시장경제가 삶에 유익하다는 체제 우위의 확실한 증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신냉전 시대에 돌입한 현 상황에서 미국이 대한민국과 맺은 동맹관계를 쉽사리 내버릴 이유가 없다. 

다만 이전 진보 정부는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이 최대의 경제적·군사적·외교적 자산을 스스로 부정하다시피 하면서 허울뿐인 한반도 운전자론을 들먹였다. 그리고 그 결과 미국, 중국, 북한 모두에게서 허당 취급을 받는 외교적 실책을 거듭했다.

향후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어 앞으로 그 형체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지 모를 한민족의 '자주' 이념을 내세우는 것이 국민들의 감정적 만족을 채워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로 인해 사실상 국제무대에서 대한민국의 외교적 포지션은 한없이 애매한 고립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로써 한국 진보 진영 정치 지도자들의 외교감각은 김진명 식 대체역사(<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남북 단합이 마치 대한민국 내 모든 문제 상황의 해결책인 것처럼 공상을 펼쳐내는 것이 현재 한국 진보 진영 정치인들의 현실 인식 수준이다. 소설은 소설로 봐야지, 현실정치와 외교는 공상과는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미국에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미 바이든 대통령 부부와 함께한 모습. ⓒ대통령실
▲미국에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미 바이든 대통령 부부와 함께한 모습. ⓒ대통령실

현재 미국은 전 세계적으로 밀어닥치는 경제 위기 조짐들을 감지하고 강력한 보호무역 태세로 돌아가는 입장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해 미국 정·재계에 경제윤리적 책임을 묻는다. 

그런데 반문하고 싶은 점은, 과연 자국의 이익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자유로운 개방적 교역이라는 경제윤리적 책임을 지킬 나라가 몇 나라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대한민국 스스로도 지키지 않을 경제적 책임을 대한민국보다 월등한 기술력과 자본력을 가진 나라에게 요구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가?

미국 경제사를 살펴보면, 애초 미국이 보호무역 태세를 유지하지 않은 시기는 자국의 산업에 대한 독보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달러 패권을 확보하고자 했던 브레턴 우즈 체제 확립 후 GATT, 우루과이 라운드, WTO 시스템이 확립된 60-70여년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그 중간에도 미국은 경제적 위협이 되는 나라가 등장하면 외교력과 달러패권으로 찍어누른 일도 다반사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시장 질서라는 기회조차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여전히 보릿고개도 넘지 못하는 세계 최빈국 수준의 처참한 경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반대편을 돌아볼 때, 과연 중국과 러시아는 자유무역의 경제윤리를 지킬 것인가? 전 세계적으로 국부 유출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극히 치졸한 방식까지 써가면서 막는 나라가 중국이다.

사실상 중국에서 이익을 보는 해외기업은 딱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진다. 하나는 중국에서 도저히 대체할 수 없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 대표적으로 삼성의 반도체다. 다음으로는 중국 내 꽌시를 잘 활용해 중국 고위층 주머니를 음성적으로 불려주는 기업. 그 외 나머지 기업들은 모두 중국에 자본과 기술을 헌납하고 퇴출될 뿐이다.

이런 중국에 비하면, 적어도 미국은 보호무역 조치를 취하지만 상대국 자본주의 시장경제 질서 자체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수준까지 경제적 침탈을 벌이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면 결국 미국의 잠재적 적성국이 늘어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국의 보호무역 정책은 적어도 여타 구 공산권 패권지향 국가들의 경제적 비윤리성에 비하면 훨씬 유화적이다.

대한민국 정·재계가 한미동맹에 결부된 이 미묘한 역학관계에 발빠르게 적응해야, 우리의 경제와 안보가 그나마 성장과 안정을 지속할 수 있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일본과 대만 정·재계는 이번 반도체 협정과 관련해 발빠르게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적응하는 길을 택했고, 그로 인해 단기적으로 희생될 이익을 중장기적으로 회복하려는 안목을 가지고 대응하고 있다.

반면 대한민국은 이전 정권에서 마치 우리 경제가 미국과의 동맹관계 없이도 중국과 북한만 있으면 살아남을 것처럼 순진무구한 이념 중심의 정책을 펴가 주변 경쟁국에 뒤쳐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우리 한민족의 폐쇄적이고 우물 안 개구리식 세계관에 잘 들어맞는 대응책이고, 그래서 단기적으로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그 경제적 폐해와 안보상의 결함은 점점 더 확연해질 것이고, 결국 우리 정·재계와 국민들은 훗날 중요한 기로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렸던 대가를 치를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 의회 의원들의 기립박수에 화답하고 있다.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미 의회 의원들의 기립박수에 화답하고 있다. ⓒ대통령실

이번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는 이 모든 외교적·경제적 실책들을 바로잡아야 할 책무를 안은 일정이었다. 당장 무역수지상으로나 투자적 관점에서 어떤 가시적 성과를 내기 전에, 대한민국 정·재계가 향후 수십년간 이어질지 모를 미국의 새로운 안보, 경제질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결의를 보여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려면 대통령 본인이 전적으로 미국 정·재계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여야 했고 이를 위해 영어 연설과 팝송 가창을 준비했던 것이다.

대통령실 측에서 발표한 방미의 경제효과 역시 결국은 한미동맹 질서 안에서 한국이 얻는 경제적 이익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게다가 이 경제효과에 관련된 기업들(특히 넷플릭스 등)이 별다른 이견을 펼치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폄훼할 이유도 없는 발표이다.

정책 효과의 과대포장으로 따지자면 이전 정부는 가히 지록위마 수준이었다. 계약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MOU 수준에서 거래한 백신 물량을 마치 국내에 이미 들여온 것처럼 확보했다는 식으로 과장광고를 펼쳤던 게 불과 2-3년 전 일이다.

마지막으로, 미국과의 동맹에서 우리 한국이 커다란 피해를 입었던 사례로 베트남전을 예로 드는 논평가들이 있다. 미국의 무리한 이념전쟁을 위해 대한민국 청년들 5천여 명이 무고하고 목숨을 바쳤다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도와줬던 미국 외 우방국들은 모두 미국에 속아넘어간 피해자들이라는 말이 된다. 우리는 그들을 피해자가 아니라 해방군, 우리의 소중한 생명과 재산과 자유를 지켜준 은인들로 부른다. 그들의 희생 위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발전의 과실을 누린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 중 그들이 어리석은 피해자라고 매도할 자격을 가진 이는 단 하나도 없다.

월남전은 불행한 전쟁이었지만, 그 전쟁으로 한국이 얻은 외교안보적·경제적 이익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국은 베트남 전에 적극 참전하여 미국으로부터 당시로서는 최신예 무기들을 공여받아 북한에 대한 상당한 전쟁 억지력을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베트남 전장은 당시 불붙은 한국의 공업력 성장에 꼭 필요한 상품시장으로서 막대한 가치를 갖고 있었다. 파병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월남전 참전용사가 아닌 이상, 베트남 전쟁의 부도덕성 문제를 가책 없이 논할 수 있는 이는 단언컨대 대한민국에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사회 전체가 당시 참전한 전쟁 영웅들 덕에 안보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진실로 악어의 눈물과 다름없다.

이런저런 역사적 현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의 현실을 고려했을 때, 윤석열 대통령이 방미 일정에서 거둔 성과는 현재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도저히 거둘 수 없는 경제적 성과, 그리고 이룰 수 없는 윤리적 책임을 들먹이면서 대통령의 방미 성과를 폄하하는 이들은 그저 현실감각 없는 민족자주 광신도들에 불과하다.

국제정치 현실은 시간을 회귀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초인이 이끌어가는 대체역사 소설이 아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한계, 현실을 감안해 피해는 최소화하고 얻을 것은 얻어내는 가능성의 기술이다. 적어도 이런 기술적 측면에서 이번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성과는 크게 나무랄 데 없는 것이었다. 

제17회 교회법 세미나
▲박욱주 박사.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