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각장애인인 실로암안과병원장 김선태 목사가 지난 26일 예장통합 서울노회 5백여명의 노회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사봉을 당당하게 두들겼다.
이로써 서울노회는 앞 못보는 시각장애인 노회장을 필두로 173회기 한 해 동안 한국교회 대부흥 1백주년 새로운 역사의 힘찬 발걸음을 알렸다.
지난 8월 아시아의 노벨상이라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던 김 목사가 서울 종로구 새문안교회(담임 이수영 목사)에서 열린 제172회 서울노회에서 노회장으로 선출됐다.
지난 1년간 부 노회장을 역임했던 김 목사는 관례에 따라 자동적으로 노회장으로 추대됐다. 시각장애인이 교단의 노회장이 된 것은 한국교회 역사를 통틀어 첫 번째다.
서울노회는 1백10여개에 가까운 교회와 5백여명이 넘는 목회자와 장로회원들이 소속되어 통합 내 가장 큰 규모다. 김 목사에 이어 내년 노회장을 맡게되는 부 노회장에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해 한국교회 최고(最古)를 자랑하는 새문안교회의 담임 이수영 목사가 선출 된 것을 보더라도 그 자리의 중요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만큼 지난해 171회 노회에서 김 목사의 부 노회장 선출은 ‘기적’같은 일이었다. 시각장애인으로 맹인교회를 세우고 실로암안과병원을 설립 하는 등 장애를 뛰어넘어 많은 일들을 이뤄왔지만 과연 치열한 논쟁이 오가는 회무 처리 등 정상인에게도 버거운 수장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김 목사님을 보면 우리가 부끄러워진다”는 한 대의원의 말처럼 김 목사를 지지하는 많은 노회원들의 격려 속에 대형 교회를 이끌고 있던 상대 목회자를 압도하고 노회장으로 선출됐다.
노회장으로 선출된 이날 김 목사는 “훌륭하신 목사 장로님들이 많은데, 한편으로는 죄송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감사할 따름이다”며 “앞 못 보는 장애인을 노회장으로 세워주신 하나님과 대의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b>남성 헬렌켈러’ 칭송 , 극적인 드라마같은 인생
막사이사이상 수상 당시 ‘남성 헬렌켈러’라는 칭송을 받았던 김 목사의 삶은 한편의 극적인 드라마 같았다. 한국전쟁 중 피난을 가지 못하고 뚝섬에 살았던 그는 어느 날 다른 친구들과 노는 도중 폭탄이 터져 친구들은 모두 죽고 김 목사만 살아남았다. 하지만 파편이 눈 박혀 양쪽 모두 실명하고 말았다.
김 목사의 부모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폭발 사고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 하루아침에 고아로 전락한 김 목사의 인생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 처절한 고통의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엎친데 덥친 격으로 걸린 난치피부병으로 투병하던 도중 그를 치료해준 어느 할머니가 기독교이었던 터라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목회자의 꿈을 품게 되었다.
목회자가 될 것을 결심 한 후 그는 서울맹학교에서 점자를 배우고 숭실중·고에 진학했다. 이후 숭실대 철학과를 졸업한 그는 장신대 신대원으로 진학한 뒤 미국으로 유학, 시카고 매코믹신학교 목회학 박사가 되고 이후부터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매진했다.
1970년 최초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해 점자성경과 점자찬송을 보급하고, 본인 스스로가 시각장애인이면서 실로암안과병원을 설립해 2만7천여 명의 시각장애인에게 무료 시술을 해주는 등 동료 시각장애인에게 ‘빛’이 돼 왔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소외당하고 힘들게 싸워나가는 장애인들을 향해 그는 “좌절하지 말고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땀과 정성, 성실을 다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인생관을 갖고 살아가기를 권한다”며 “어렵고 힘들어도 꿈과 희망, 용기를 갖고 장애를 극복해 나가면 반드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로써 서울노회는 앞 못보는 시각장애인 노회장을 필두로 173회기 한 해 동안 한국교회 대부흥 1백주년 새로운 역사의 힘찬 발걸음을 알렸다.
지난 8월 아시아의 노벨상이라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던 김 목사가 서울 종로구 새문안교회(담임 이수영 목사)에서 열린 제172회 서울노회에서 노회장으로 선출됐다.
지난 1년간 부 노회장을 역임했던 김 목사는 관례에 따라 자동적으로 노회장으로 추대됐다. 시각장애인이 교단의 노회장이 된 것은 한국교회 역사를 통틀어 첫 번째다.
서울노회는 1백10여개에 가까운 교회와 5백여명이 넘는 목회자와 장로회원들이 소속되어 통합 내 가장 큰 규모다. 김 목사에 이어 내년 노회장을 맡게되는 부 노회장에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해 한국교회 최고(最古)를 자랑하는 새문안교회의 담임 이수영 목사가 선출 된 것을 보더라도 그 자리의 중요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만큼 지난해 171회 노회에서 김 목사의 부 노회장 선출은 ‘기적’같은 일이었다. 시각장애인으로 맹인교회를 세우고 실로암안과병원을 설립 하는 등 장애를 뛰어넘어 많은 일들을 이뤄왔지만 과연 치열한 논쟁이 오가는 회무 처리 등 정상인에게도 버거운 수장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김 목사님을 보면 우리가 부끄러워진다”는 한 대의원의 말처럼 김 목사를 지지하는 많은 노회원들의 격려 속에 대형 교회를 이끌고 있던 상대 목회자를 압도하고 노회장으로 선출됐다.
노회장으로 선출된 이날 김 목사는 “훌륭하신 목사 장로님들이 많은데, 한편으로는 죄송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감사할 따름이다”며 “앞 못 보는 장애인을 노회장으로 세워주신 하나님과 대의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b>남성 헬렌켈러’ 칭송 , 극적인 드라마같은 인생
막사이사이상 수상 당시 ‘남성 헬렌켈러’라는 칭송을 받았던 김 목사의 삶은 한편의 극적인 드라마 같았다. 한국전쟁 중 피난을 가지 못하고 뚝섬에 살았던 그는 어느 날 다른 친구들과 노는 도중 폭탄이 터져 친구들은 모두 죽고 김 목사만 살아남았다. 하지만 파편이 눈 박혀 양쪽 모두 실명하고 말았다.
김 목사의 부모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폭발 사고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 하루아침에 고아로 전락한 김 목사의 인생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 처절한 고통의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엎친데 덥친 격으로 걸린 난치피부병으로 투병하던 도중 그를 치료해준 어느 할머니가 기독교이었던 터라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목회자의 꿈을 품게 되었다.
목회자가 될 것을 결심 한 후 그는 서울맹학교에서 점자를 배우고 숭실중·고에 진학했다. 이후 숭실대 철학과를 졸업한 그는 장신대 신대원으로 진학한 뒤 미국으로 유학, 시카고 매코믹신학교 목회학 박사가 되고 이후부터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매진했다.
1970년 최초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해 점자성경과 점자찬송을 보급하고, 본인 스스로가 시각장애인이면서 실로암안과병원을 설립해 2만7천여 명의 시각장애인에게 무료 시술을 해주는 등 동료 시각장애인에게 ‘빛’이 돼 왔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소외당하고 힘들게 싸워나가는 장애인들을 향해 그는 “좌절하지 말고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땀과 정성, 성실을 다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인생관을 갖고 살아가기를 권한다”며 “어렵고 힘들어도 꿈과 희망, 용기를 갖고 장애를 극복해 나가면 반드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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