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색 스웨터를 입고 강의하러 갔더니 한국에서 갓 온 학생이 그런다. ‘남자가 핑크색 입으면 동성애 그런 거 아니냐고.’ 그 말을 듣자 미국에 초등학교 때부터 온 학생이 ‘Tough guy wears pink.’(터프가이는 핑크 색 옷을 입는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사실 청년 시절 별명이 터프가이였는데, 어찌 이렇게 잘 맞을까.
색깔이 사람을 규정할 때가 있다. 빨갱이, 회색분자, 속이 검은 놈, 싹수가 노란 놈 등등. 우리는 이렇게 색깔로 사람을 판단하고 어떤 범주에 집어넣을 때가 많다. 그렇게 규정한 색깔로 편을 가른다. 같은 색깔 아니면 적이다. 왜 이렇게 색깔로 사람을 나누고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까.
기독교 역사에서 도나투스파는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하던 시기에 신앙을 지키고 성경을 지켰던 이들이다. 그런 까닭에 신앙을 버리고 성경을 버리고 교회를 떠났던 이들을 배교자로 불렀으며, 그들이 교회로 돌아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에 반해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는 병원 같은 곳이기에 영적으로 아픈 이들을 받아줘야 한다고 했다. 도나투스는 신앙의 순수성은 지켰지만, 그 순수성을 타인을 정죄하는 무기로 삼았던 것이 문제였다.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어떤 도덕적 잘못을 저지른 목사를 비판한다. 그 교회는 가지 않으려 한다. 어떤 의미에서 도나투스적이다. 하지만 역사가 도나투스가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의 손을 들어주었다면, 우리의 태도도 수정될 필요가 있다. 죄를 정당화하자는 말이 아니다. 신앙의 순수함을 지켜야 하는 것은 자기에게로 돌리고 타인에게는 아우구스티누스적 관대함과 포용성을 가지자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쩌면 그 반대인지도 모르겠다. 타인에게는 신앙의 순수함과 철저함을 요구하고, 자신에게는 신앙의 관대함과 유연함을 적용하지는 않은가.
교단 분열은 어쩌면 “순수”에 대한 집착에서 기인하지 싶다. 나는 기독교 정통 교리를 지켰는데 이 교리와 조금만 달라도 분열의 동기가 된다. 논쟁은 일치를 위한 논쟁이어야 하고, 살리는 쪽으로 기울어야 한다. 상대방이 이단이 아닌 이상, 분열이나 죽이는 쪽이 아니라 회복하고 일으키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영화 에 보면, 사람들이 더 이상 경주용 말로 쓸 수 없는 말을 죽이려 하자, 한 사람이 ‘죽이지 말라’하며 자신이 데려가겠다 한다. 그리고는 그 말이 다친 다리를 보살펴 준다. 한 사나이가 ‘달리지도 못하는 말을 왜 고쳐 주려 하나’고 묻자, 그가 대답한다. “Cause I can”, 즉 “내가 고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한다. 여전히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버린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에 대한 바른 자세는 아닐 것이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you don’t throw up a whole life away, just cause he’s banged up a little.”(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함부로 전체 삶을 버리지는 말라).
버리는 인생, 죽이는 인생이 아니라, 살리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교회에 문제가 있다고 교회를 버려서는 안 되지 않은가. 다시금 교회를 회복해야 하지 않은가. 그러기 위해 대화하고 소통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너 무슨 색깔이지, 나 무슨 색깔이야’가 아니라, 서로 만나 한 색만 가지는 단조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아름다운 색깔을 만든다면 그것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푸른 나뭇잎도 아름답지만, 가을날 울긋불긋 색이 든 단풍은 더 아름답지 않은가.
미국에 있는 한인 신학교에서 가르치다 보니 학생들 배경이 다양하다. 한국 같으면 장로교 통합 교회 출신이 장로교 통합 신학교를 가고, 합동 교회 출신이 합동측 신학교를 가고, 침례교 교인이 침례 신학을 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여기는 통합, 합동, 고신, 기장, 감리교, 침례교 등등 다양한 교파 학생들이 와서 공부한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자연스럽게 다른 교단들의 입장을 알게 되고 대화하게 된다.
그리고 사실 학생들이나 교인들은 자신이 신앙생활 했던 교단에서 자라고 신앙생활 했기에 그것에 익숙할 뿐이지, 그 교단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 잘 모른다. 그렇게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다는 점에서 이민 사회 속에서 한인 신학교가 가지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그런 만남의 장을 만들었으면 한다. 교단 간의 왕래나 신학교 교수들 간의 세미나나 친목회를 통해 만나고 대화하고 소통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분열이 아닌 일치로 나아가는 교회 연합의 중요한 시발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새 한 마리 가로등 위에 사뿐히 앉고는 가로등 폭만큼 걸어간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자신도 떨어진다는 것을 아는지 그 끝에 두 발을 딛고 멈춰 선다. 그런데 날개가 있지 않은가. 떨어지면 날면 되지 않은가. 몰라서가 아닐 것이다. 그도 때론 그렇게 날갯짓을 멈추고 두 발을 딛고 쉬고 싶어서 그런 곳에 서서 멀리 바라볼 것이다.
우리도 분열의 날갯짓을 멈추고 잠시 서서 멀리 바라보자. 그리고 물어보자.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나뉘어 있는가. 해 아래 새것이 없는데, 무엇 그리 자기만 옳다고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을까? 이제는 율법적 순수주의라는 교단 분열의 동기를 재고하며, 가뜩이나 분열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민 교회가 달라지기를 바람과 동시에 교회 일치 쪽으로 몸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