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적 살던 집 가까이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우리 집은 한옥이었는데, 대청마루에 앉아 마당 위 처마 사이로 뚫린 하늘을 향해 시선을 두면 어김없이 교회 뾰족탑이 보였습니다. 그 뾰족탑 맨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있었지요. 그 당시에는 그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저 십자가가 있는 곳이니 교회라고 아는 정도밖에는요.
그 교회는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한 번 나갔다 그만둔 교회였습니다. 넓은 마루에 방석을 깔고 앉는 예배실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지요. 하루는 예배당 주변을 서성이다가 사탕을 준다기에 쭈뼛거리며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예배실 마루에서 아이들과 뛰놀다가, 집에 가려고 신발을 찾는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발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었지요. 누군가 나의 신발을 바꿔 신고 가버린 겁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교회에 갈 일이 없었지요.
당시에는 새벽예배, 그리고 일요일 예배 시간이 되면 교회 종탑에서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그 종소리는 교회 식구들에게는 새벽 예배를 알리는 소리였지만, 동네 사람들에게는 그 소리가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습니다. 나름대로 정취가 담긴 소리였지요. 특히나 시골에서 들리는 종소리는 더더욱 마을 사람들에게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이었지요. 그런데 내가 중학교 다닐 무렵에 더 이상 종소리가 들리지 않더군요. 대신에 교회 첨탑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종소리가 나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더니, 나중에는 찬송가가 들려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교회 첨탑 상단부에 설치된 여러 개의 확성기에서 나오는 찬송은 당시 주변 주민들에게는 귀를 막고 짜증을 낼 수밖에 없는 소음이었지요. 그래도 주민들이 그 소음에 대해서 대놓고 교회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냥 참고 사는 거였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공공질서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시절이라, 당시 교회도 그런 행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보질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확성기에서 나오는 소리가 더 멀리 퍼져나가라고 한껏 볼륨을 올려놓으니, 주변 주민들의 잠을 방해하는 골칫덩어리였어요. 새벽에는 새벽대로, 일요일에는 모처럼 늦잠을 자고 싶은 자들에게 큰 방해 거리가 되고 말았지요. 그러니 당연히 동네 사람들의 불평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확성기 소리는 좀체 줄어들 줄 몰랐습니다. 나중에는 베개로 귀를 감싸면서 욕을 해댔던 적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교회 확성기 소리는 더 이상 새벽을 알리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는 교회의 무례한 태도로 보였습니다.
이렇게 교회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던 내가 교회에 관심이 가기 시작한 게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는데, 그곳에 가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될 것 같았지요. 지금까지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열릴 것만 같은 그런 기대감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동네 근처에 있는 한 작은 교회가 눈에 띄어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누가 전도해서 간 것도 아니었지요. 그렇다고 혼자 불쑥 찾아가기는 뻘쭘해서, 마침 그 교회에 다니던 같은 반 친구를 만나게 되어, 그 친구와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가보니 남자아이들만 득실거렸던 학교와는 달리 여학생들도 있어선지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당시 남녀공학 고등학교가 아주 드물었기에, 십 대 아이들이 이성과 함께 어울려 활동할 수 있는 장소로는 교회가 단연 독보적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기성세대가 용인하는 장소에서 함께 활동하며 성장할 수 있는 곳이 매우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다른 학교 학생들을 만나 서로 배울 수 있는 열린 장소였습니다. 그랬기에 당시에도 교회를 ‘연애당’이라 불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별명이 싫어서 학생들 간의 개인적인 사귐을 허락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그게 어디 막는다고 막아지겠습니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지요. 오히려 건강한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면 훨씬 아름다운 공동체가 가능했을 테지요. 불행히도 교회 안과 밖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한창 예민한 아이들을 위한 건강한 만남의 자리를 제공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교회의 어른들 또한 이성 간의 건강한 사귐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원인도 있었을 겁니다. 한국 사회의 유교적 분위기 때문에 말입니다.
내가 학습문답과 세례문답을 마친 후 세례를 받았을 때가 고등학교 2학년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에 받았던 학습과 세례 교육 내용을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요. 더더군다나 그 교육 과정에서 들은 용어들은 모두 생소하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이 과정을 다 이수해야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에 교육 모든 과정을 빠지지 않고 다 참석했습니다. 그리고는 세례를 받고 나서 곧바로 이어진 공동의회에 참가하게 되었지요. 세례를 받은 자는 정식 교인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산결산 보고서를 처음 접한 나는 교회 예산 부분을 살피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담임목회자의 도서비 액수였습니다. 그래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손을 들었지요. 나는 중고등부 일로 담임목사 사택을 여러 번 들락날락했기에 목사님 서재의 오래된 책과 새 책이 얼마나 있는지 거의 파악하고 있었기에 책정된 도서비가 어떤 근거로 책정된 건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었지요.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