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 20일은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기념하는 ‘장애인의 날’입니다. 장애인에 대해 바로 알리며 그들의 권리와 복지를 촉구하는 여러 다양한 행사들이 열립니다. 또 지난 주일은 한국교회에서 지키는 ‘장애인 주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 말씀을 통해 장애의 신앙적 의미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9장1~3절은 ‘장애’와 관련된 설교를 할 때 자주 인용되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장애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장애인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고 있지만, 이 요한복음 9장 말씀이야말로 장애에 깃든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에게 가장 큰 교훈과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부터 삶이 힘들고 앞길이 막힐 때마다 이 9장 말씀을 반복해 읽으며 새로운 힘을 공급받고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을 다져올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는데 어떤 시각장애인 한 명과 마주쳤습니다. 그 시각장애인은 앞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옷도 허름하게 입은 채 지팡이로 앞을 더듬더듬 짚으며 매우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은 그 시각장애인이 하도 딱해 보이고, 한편으로는 더듬더듬 걸어가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여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 자신의 죄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입니까?”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질병이나 장애 등 인간이 겪는 고난의 원인을 인과론적 관점에서 해석하여 하나님께 대한 죄의 결과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구약성경 <욥기>에서 욥이 겪는 고난을 그의 죄의 탓으로 돌린 세 친구들이 바로 이런 인과론의 대표자일 것입니다.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유교 문화권에서 살아온 우리 한국인들 역시 육신의 질병을 앓으면 죄와 관련되었다고 생각하고 질병을 죄에 대한 형벌로 곧장 연결하려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지 질병과 관계된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 현재 성도들을 괴롭히는 여러가지 고난과 불행, 장애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도 뿌리를 같이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실 성경 전체를 통해 보면 질병과 죄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에 대한 징벌로 병을 얻게 되고, 그래서 죄를 용서해준다는 것과 병고의 상태로부터 구원해준다는 것은 늘 동의어로 쓰이곤 합니다. 가령 시편 103:3에 보면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라고 하여, 한 사건을 죄 사함과 병 고침의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에 대한 비유들은 대부분 이 시편 103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비유들을 보면 죄 사함과 병 고침이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고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에는 장애를 보는 시각이 곱지 않았습니다. 위의 요한복음 9장에 기록된 제자들의 인식처럼, 종종 장애나 질병은 개인의 죄에 대한 징벌로 이해되기도 했고 또 그 부모나 조상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결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전통적 인식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제시하셨습니다. 시각장애인의 눈이 멀게 된 것은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 선포하십니다. 즉, 본인의 죄 때문도 아니고 부모의 잘못 때문도 아니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그가 시각장애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당사자에게는 자신의 처지에 결코 실망하지 말고 더욱 더 열심히 살라는 희망과 용기를 불러 일으켜주시고, 그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 몸 불편한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너희와 똑같은 인간이니 그를 차별하거나 업신여기지 말고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사랑하며 다른 사람과 똑같이 평등하게 대하라’는 인간 존엄의 정신을 심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 시각장애인을 통해 당신의 사랑과 능력을 나타내셔서 그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시용하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시각장애인은 빛을 보게 되었고, 빛을 봄으로써 예수를 바로 이해하고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예수를 증거하는 생명의 도구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위해 의미 있게 사용되었다고 요한복음 9장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애나 질병으로 고난 받는 사람들을 볼 때 무조건 그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이라고 함부로 단정 짓는 원시적 사고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또 본인부터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가 고난을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항상 1대 1로 상응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병이나 심신의 장애, 자연재해 등 인간이 당하는 여러 고난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 것일까요? 성경은 ‘원죄’의 결과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증언합니다. 이런 결과를 ‘De-Form’이라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당신을 닮은 형상(Imago Dei)이 망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대개의 경우 De-Form은 인간의 내면(영혼)에 생겨났고, 그 결과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음도 없어졌습니다. 또 어떤 경우엔 그 De-Form이 인간의 외면적 모습으로도 나타나는데, 이것이 곧 질병이요 장애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는 일차적으로 ‘죄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죄’란 어느 한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나 잘못(actual sin)이 아니라 우리 인류 모두에게 공통으로 책임이 있는 원죄, 혹은 구조적인 죄(original and structural sin)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장애는 개인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이라기 보다는 인류 전체가 함께 지은 원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장애란 인간에게 원죄가 있음을, 그 결과 온 인류가 함께 벌을 받고 있음을 상기시키고자 가시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징표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장애의 책임이 장애인 당사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인식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자연재해 현상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2011년,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가져온 일본의 쓰나미 사태 역시 일부 목회자들의 말처럼 일본인들이 예수님을 안 믿어서 받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받을 불순종과 죄의 대가를 그들이 대표적으로 받은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 현재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자연재해는 하나님의 자의적이고 무조건적인 형벌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이 창조하신 자연세계를 인간의 욕구와 필요에 따라 무한정 남용하고 훼손한 데서 초래된 결과임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눈앞에 보이는 현상만을 가지고 자연재해를 당한 사람들을 판단, 정죄하지 말고, 나의 죄로 인하여 그들이 고통당함을 바르게 인식한 채 진실한 회개와 함께 그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섬김과 나눔의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개별적인 의지나 행위에 상관없이 인류 전체의 원죄로 말미암아 고난과 고통은 언제나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죄적 한계 속에서도 우리를 위로하며 소망을 주는 ‘기쁜 소식’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신앙 안에서는 장애라는 고난조차도 ‘숨겨진 축복이요 은혜’라는 것입니다. 바로 장애의 고통을 통해 나의 연약함을 깨닫고 진정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나의 구주로 믿고 따르게 되며, 더 나아가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해 그들의 영혼을 살리는 복음전파의 도구로 사용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장애인들도 "왜 나만 이렇게 고난을 받아야 하나?”라고 괴로워하거나 나의 특정한 죄 때문에 장애나 질병이 생긴 것이라고 좌절하거나 죄의식에 빠지지 말고, 비록 육신적으로는 불편함을 입었지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 ‘생명의 그릇,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질병이나 고통의 문제에 대해 섣불리 죄와 직결시켜 판단하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죄를 지어 그 결과 고난을 받는 것이 명백하다면 그에게 회개를 권고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시키는 겸손한 자세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나 장애인들을 바라보며 가져야 할 자세는 그들이 우리를 대표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들과 고통을 함께 나눠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을 동정하는 것도, 자선을 베푸는 일도 아니며, 다만 나의 책임의 일부를 갚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큰 장애는 나의 내면에 있는 교만과 무관심임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에게 장애와 고난을 주시고, 또 그들을 우리 가까이 있게 한 이유요, 그분의 거룩하신 섭리라고 믿습니다.

<기도>
주님,
장애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
육체적 불편함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의 차별과 편견, 경제적 궁핍함 등으로 인해
저희들 너무나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의 고통을 헤아려 주옵소서
세상 풍파에 휘둘리고 상처받은 저희의 영혼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따스한 손길로 치유하여 주소서.
장애는 불행이나 저주,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숨겨진 축복이란 강한 믿음으로
결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이 험난한 세상을 용기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소서.
항상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소서.
또한 우리 한국교회도 무지와 무관심, 편견에서 벗어나
더욱 헌신된 마음으로 장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장애인이 앞서는 세상을 이루어 가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글 | 이준수 목사 (남가주밀알선교단 영성문화사역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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