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렬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신약학)
(Photo : ) 이장렬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신약학)

이장렬 교수는 서울대학교(B.M.), 서던침례신학대학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영국 에딘버러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에서 수학했으며, 2010년부터 캔자스시티에 소재한 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Mid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 교수로 목회자와 신학자를 양성하는 사역에 힘쓰고 있다. 마가복음과 신약기독론 등 성서학 분야의 연구를 이어가는 한편, 목회자와 성도들을 위한 말씀 묵상 안내서를 저술하는 데 열정을 갖고 있다.

[2023년 4월 7일 금요일]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전체 본문: 마태복음27:1-61

읽을 본문: 마태복음 27:42-54

27: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27: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27: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주: 시편22:1의 인용]
27: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27: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27: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27: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27: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해설과 묵상

1.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Christ)
마태복음 27장 시작부는 산헤드린(공회)이 새벽부터 모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그를 인계했음을 알립니다(1-2절). 곧 가룟 유다의 비극적 최후가 묘사되는데, 그는 극도로 후회했지만 안타깝게도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3-10절). 이어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이 묘사됩니다(11-26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했습니다. 다름 아닌 시기심 때문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자신에게 넘겼음을 그는 간파했습니다(18절). 그러나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를 석방했다가는 로마제국 내에서 다루기 까다롭기로 소문난 집단인 유대인들이 민란을 일으킬 수도 있겠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민란이 일어나게 되면 자신의 정치적 생명도 끝이라는 계산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로마 총독은 폭동을 주도했던 바라바는 풀어주면서, 무죄한 예수에게는 십자가형을 선고합니다(24-26절). 빌라도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물을 갖다 손을 씻는 퍼포먼스를 합니다. 물론 그런다고 그의 책임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 공개 퍼포먼스를 통해 총독 빌라도는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려 들지만, 자기 정치적 생존을 위해 불의에 굴복하고 산헤드린이 주동한 군중의 압박(20절)에 타협한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행4:27; 사도신경: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빌라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스스로 져야 할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그의 결정이 아주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철저히 정치적 셈법을 따른 결정이었습니다.

곧이어 마태는 로마 군병들이 나사렛 예수를 모욕하고 희롱하는 장면을 기록합니다(마27:27–31). 가시 면류관은 예수님에게 신체적 고통을 주었고, 그를 거짓 왕으로 모욕하는 병사들의 조롱은 거기에 심리적 고통까지 더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참 왕이신데도 마치 짝퉁 임금인 듯 희롱을 받습니다. 주님은 로마의 잔혹한 처형틀,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십자가형 집행과 지켜보던 이들의 극심한 조롱(32-44절) 그리고 예수님의 임종 및 그때 벌어진 놀라운 사건들(45-56절)에 대해 생생히 보도합니다. 이어 아리마대 출신의 부자인 요셉에게 우리는 잠시 주목하게 되는데, 그는 예수님의 제자답게 목숨 건 용기를 내어 십자가에 달려 처형된 스승의 장사를 성심껏 주관합니다(57-61절).

2. 세 관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임종하시는 장면은 오늘 읽은 마태복음 27장 45-54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고대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잔인하고도 공포스러운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이 가져오는 극한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이, 벌겨 벗겨진 채로 나무에 매달려 죽는다는 것은 극도의 수치와 모욕을 뜻했습니다. 이는 사형수의 배설 장면까지 군중에게 여과 없이 공개됨을 뜻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십자가형이 모든 이에게 전적으로 동일한 의미로 다가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점
유대인들에게 있어 십자가 처형이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을 뜻했습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란 도식이 십자가에 달린 죄수에게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신21:23 참조). 그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굳이 빌라도를 압박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자 애썼던 것입니다(행7:58; 23:12-15 비교).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가 되는 셈이고, 그러면 예수는 자동적으로 가짜 메시아로 판명 나게 된다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추종자들 역시 해산할 것이라고 그들은 추측했습니다.

로마인의 관점
한편 로마인의 관점에서, 십자가형은 황제의 권위에 무모하게 도전한 정치범의 처참한 최후를 뜻했습니다. 고대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잔인한 사형방식인 십자가형은 로마시민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주: 로마시민의 경우 참수형이 집행되었음). 십자가 처형 장면이 너무나 잔혹했기에 로마인의 교제 자리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될 정도였습니다. 로마 정부의 입장에서 십자가형은 제국의 권세에 도전하는 범죄자의 운명을 공개적으로 시연하는 공포정치의 일환이었습니다.

복음의 관점
십자가를 바라보는 유대인의 관점과 로마인의 관점이 전적으로 동일하진 않았지만, 그들 모두에게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처참한 실패를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3-24). 우리가 스스로의 죄 때문에 그 처참한 형벌을 당해야 했지만 주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음을 사도 바울은 선명하게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고후5:21 참조])!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며, 또한 우리가 다음과 같이 찬양을 드리는 이유입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 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못 박힌 손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새찬송가 149장, 1절 및 3절).

3. 십자가 복음의 역설(Paradox)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집행했던 로마 백부장은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마27:54). 그런데 그 고백의 시점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직후였다는 사실이 더 놀랍습니다. 왜냐면, 방금 살펴본 대로, 당시의 십자가는, 신앙적 헌신이나 제자도의 상징이 아니라, 처절한 실패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은 이 로마 백부장이 처음이 아닙니다. 시몬 베드로도 앞서 그렇게 고백했습니다(마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로부터 채 몇 분 지나지도 않아 주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16:23)는 호된 책망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 그렇게까지 호되게 책망하셨을까요? 그것은 시몬 베드로가 주님이 가셔야 할, 십자가로 향하는 그 길을 막아서려 들었기 때문입니다(16:22). 다소 신학적인 용어를 쓰자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적인(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을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분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본문에서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의 임종과 그 후에 벌어진 놀라운 일들을 목도하면서 이 둘의 역설적(paradoxical) 통합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대제사장들(*주: 현직 대제사장 및 대제사장을 역임한 그 일가친척들)을 위시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에게 극도의 언어학대를 거듭 가하며 그를 모독합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27:42). 우리는 바로 여기서 십자가의 역설(paradox)을 발견합니다. ‘유대인의 왕’ 노릇을 해 보려면 짝퉁 메시아로 모욕당하는 예수가 바로 이스라엘의 참 임금입니다. 남을 구원한다고 큰소리쳤으나 자기 목숨마저 부지 못하는, 들통 난 허풍쟁이로 낙인 찍혀 버린 나사렛 예수가 바로 구약이 예언한 그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처형틀에서 내려와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는 대신,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서 기꺼이 내어 주사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 형을 집도하던 백부장과 로마 병사들을 무력과 강압으로 쳐부수며 보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방인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청하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끌어 안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이 놀라운 역설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신비를 발견하며 우리가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주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마주합니다. 그리고 주의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한 줄 기도(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새찬송가 305장, 1절)

** [묵상 심화를 위한 팁] 오늘 읽은 본문에 추가하여 전체 본문(마27:1-61)을 읽으시면 오늘 묵상한 본문에 대한 이해가 심화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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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고난주간 묵상 가이드는 이충재 박사와 공저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요단출판사, 2021)에서 필자가 저술한 내용 일부를 발췌하여 개정 및 증보했다. 출판사 및 공저자의 허락 하에 이 책의 내용 일부를 재사용함을 밝힌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64032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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