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감 교육국 총무 김낙환 목사(D.Min)
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감 교육국 총무 김낙환 목사(D.Min)

다. 우남의 초혼(初婚), 박승선 (1875- ?)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양반집 자녀들은 조혼(早婚)하게 되어 있었는데 우남은 1890년 15살이 되던 해 부모가 간택한 우수현 근처의 동갑나기 음죽 박씨와 결혼하였다. 나중에 남편의 이름에서 승자를 따서 승선이라는 신식 이름을 갖기도 했던 부인은 남편이 정치개혁을 부르짖으며 활약할 무렵에 아들 봉수를 낳았고, 우남이 6년간의 감옥생활에서 풀려나 미국에 건너간 다음에는 홀로 시아버지를 모시면서 집안일을 챙겼던 조강지처였다. 우남 부부와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지냈던 신흥우는 그녀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해 주고 있다.

그 여인은 성격이 급하기도 했으나 매우 진보적인 사람으로 구습에 구애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남보다 먼저 머리를 서양식으로 올려서 따기도 했고, 또 거리에 나갈 때에는 너울을 쓰지 않고 나가기도 했다. 1898년 우남이 체포된 후에는 남편을 풀어 줄 것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고, 사흘 밤낮을 덕수궁 앞에 꿇어앉아 탄원을 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남편 못지않게 진취적인 여성이었던 것이다. 손세일은 박씨 부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박씨 부인은 3월 23일에 상소문을 직접 써 가지고 와서 인화문(仁化門) 앞에 나아가 엎드렸다. 황성신문에 이승만의 재판기사가 난지 사흘 뒤의 일이었다. 이 사실을 보도한 당시의 신문은 부인이 남편을 위하야 상소하는 뜻은 뉘 장하다 아니 하리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그녀의 행위가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하자 그녀는 우남을 구하기 위하여 중추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헌의서(獻議書)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본인의 남편이 본디 가세가 청빈하야 외국인의 집으로 다니며 고용을 하다가 연소몰각한 탓으로 망령되이 민회에 발을 들여 놓았고 횡리지액(橫罹之厄: 뜻 밖에 당한 재액)을 당하야 죄수가 되었더니 남의 꾀임을 듣고 월옥(越獄) 도주(逃走)하려다가 망사지죄(罔赦之罪:용서할 수 없는 큰 죄)를 범 하였은 즉 무죄 방송하기는 본인의 헤아리는 바가 아니오나 조속히 판결 방송하야 팔순 시모와 청년여자의 무의탁하야 노상으로 유리하고 고생함을 면하게 하야 주소서."

당시에 우남은 한성감옥에 있는 동안 아내를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詩)를 남기기고 있다.

세월아, 아낙 위해 머물러다오
짝 잃은 원앙을 어찌하자고
외론 새라 달밤에 자주 놀라고
고향 가을 가득 실은 먼 기러기
그릴 때는 연꽃 따는 노래 부르고
버들보고 시름한적 몇 번이던고
타향살이 이다지도 초라할 손가
이별이란 인간치곤 못할 일이야

부인은 여자로서 그리 예쁘지는 않았다고 전해진다. 오른쪽 얼굴의 눈과 귀 사이에 5 센치미터 정도의 검은 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우남이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시아버지를 모셨다. 어린애가 생긴 것은 우남이 감옥에 들어가기 전 얼마 안 되는 때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로 간의 심한 성격불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우남이 미국에서 환향 후 이혼하였던 것이다.

1904년 11월 미국에 고종 밀사로 떠나기 전 가족사진. 맨 오른쪽이 박씨 부인, 그 옆이 이승만이다. ⓒ이승만기념관
1904년 11월 미국에 고종 밀사로 떠나기 전 가족사진. 맨 오른쪽이 박씨 부인, 그 옆이 이승만이다. ⓒ이승만기념관

유영익 박사는 자신의 글에서 부인 박씨는 '불같은 성격을 지닌 신식 여성'으로서 성격이 남편과 너무 닮았기 때문에 애당초 부부간의 금술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들의 유일한 아들인 봉수가 미국에서 세상을 떠난(1906년) 다음 그녀와 시아버지 경선공과의 사이도 악화 되었다고 한다. 우남은 귀국직후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어 있는 아버지와 부인 사이에 끼어 불편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날로 증폭하는 가정 내 불협화음을 견디다 못해 드디어 1910년 겨울 어느 날 밤, 이부자리를 걷어들고 창신동 집을 뛰쳐나갔으며 결국 박씨와 사실상의 이혼을 하였던 것이다. 신흥우는 올리버와의 대담에서 박씨 부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기고 있다.

"이승만 부인은 퍽 오랫동안 혼자서 언덕 위의 집에 살고 있었다. 신흥우와 그의 부인은 때때로 그녀를 방문하곤 했었다. 그녀는 하숙을 치기도 했고 언덕땅에 무엇을 심기도 하면서 할 수 있는 대로 살기위해 노력을 했는데 하숙 들었던 어떤 한국인과 실질적인 부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일본말을 유창하게 했는데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고 너무나 야비해서 신흥우 부부는 진절머리가 나서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이승만에 대해서는 아는 대로 모든 말을 해 주었지만 다시 돌아가지 않았고 그 후로 소식이 끊어져 버렸다."

우남은 이로부터 긴 망명생활을 하면서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늘 혼자 지내다가 그가 58세 되던 해인 1933년 오스트리아 여성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Rhee, 1900-1992)를 만나 다시 결혼하고 그녀와 90여 평생을 해로하였다. 두 분이 처음 만날 그 당시 프란체스카는 33세 그리고 우남은 58세였다. 우남은 프란체스카 여사와 평생을 행복하게 해로 하기는 하였으나 대통령이 된 이후에 항상 세 가지를 후회하였가고 하는데 하나는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의 후사를 이을 자식이 없는 것이요,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아내를 외국인으로 맞이한 것이라고 하였다. <계속>

※ 기독일보는 2023년 새해를 맞이해 김낙환 목사(D.Min)가 저술한 논문 '우남 이승만 신앙연구: 신앙형성(Spiritual Formation)을 중심으로'를 연재합니다. 지면 분량 상 각주는 생략했습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