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는 6.25 전쟁 당시 북한 정권의 강제 납북으로 인해 정치계와 법조계, 언론계 등 국가 전체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은 한국교회였다. 지도자들을 잃어 전후 교회 재건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납북된 인물 중에는 기독교장로회 교단의 신화적인 인물이자 조선신학교(現 한신대학교) 창립자인 송창근 목사, 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이던 남궁혁 목사, 초대 제헌의원이자 장로교의 거물이던 오택관 목사, 서울신학교 교장이던 이건 목사 등 교단을 넘어 당시 한국 기독교의 상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김성호 목사(6·25납북인사가족협의회 대표, 아시아태평양인권협회 상임고문)는 당시 납북됐던 서울신학대학교 김유연 교수의 장남으로 4년째 납북자들의 구명과 가족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고 있다.
"아버님이 납북되시던 모습을 목격한 어머니는 그때의 충격으로 단명하셨습니다. 연희대학교에 다니고 있던 저는 아버지의 흔적이라도 찾고 싶어 무장첩보대에 자원해 송악산까지 투입됐었죠. 그러나 아버님은 결국 북한의 지하교회 목사들과 연락을 취하시다가 발각돼 주모(음모의 주동자)급 죄명을 쓰시고 끌려가셨습니다. 그게 아버님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김 목사는 납북자 가족들이 북한 정권뿐 아니라 남한 정권에 의해서도 심각한 피해를 입은 '이중적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전쟁 발발 후 사흘만에 서울이 함락됐지만 이승만 정권이 "서울은 안전하니 안심하라"고 녹음된 방송을 한 뒤 한강다리를 폭파했기에 피신 기회도 잃은 데다가, 전후에도 납북 인사들이 간첩으로 파송될 가능성이 있다는 명분으로 공무원 취직을 제한받는 등 연좌제를 적용당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대중 정권 이후에는 햇볕 정책으로 인해 납북자 문제는 거론조차 기피당했다. 통일부에 항의 서한도 보내봤지만 "그동안 북측의 비협조로 납북자 명단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답장만 받았다. 하지만 납북자가족협이 발간한 자료에는 이미 82959명이나 되는 납북자의 신상명세가 기록돼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국군 경찰에 의해 피해를 입은 민간인은 조사한다면서, 빨치산들에 의해 고발당하고 잡혀가고 학살된 민간인은 왜 조사하지 않습니까? 인권은 보편적인 것이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김 목사는 한국 사회와 기독교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납북자가족의 고통과 그들에 대한 인권 침해에 대해선 무관심하면서 친북 좌경화되는 세태에 대해 울분을 터트렸다.
"교회가 납북자 인권에 무관심한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공의가 따르는 사랑'임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선 김정일 정권을 분명히 심판하십니다. 그래야만 북한 주민들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김정일과 북한 주민을 별개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 목사는 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무신론적 역사관에 입각해 출발한 것으로 기독교와 절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나 김정일 정권은 마르크스의 사상과도 거리가 먼 종교집단화된 정권이기 때문에 교회가 그와 타협하는 것은 크리스천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우리는 너무 국지적인 것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유대주의와 율법을 깨고 하나님의 사랑을 세계화시킨 것입니다. 김정일 정권만 보고 자신의 편견 안에만 갇혀 있지 말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예수의 마음으로 생각해야만 북한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김성호 목사는 서울신학대학과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대한기독교교육협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화곡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다가 은퇴한 뒤 현재는 납북자 인권 문제에 전력하고 있다.
이때 납북된 인물 중에는 기독교장로회 교단의 신화적인 인물이자 조선신학교(現 한신대학교) 창립자인 송창근 목사, 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이던 남궁혁 목사, 초대 제헌의원이자 장로교의 거물이던 오택관 목사, 서울신학교 교장이던 이건 목사 등 교단을 넘어 당시 한국 기독교의 상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김성호 목사(6·25납북인사가족협의회 대표, 아시아태평양인권협회 상임고문)는 당시 납북됐던 서울신학대학교 김유연 교수의 장남으로 4년째 납북자들의 구명과 가족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고 있다.
"아버님이 납북되시던 모습을 목격한 어머니는 그때의 충격으로 단명하셨습니다. 연희대학교에 다니고 있던 저는 아버지의 흔적이라도 찾고 싶어 무장첩보대에 자원해 송악산까지 투입됐었죠. 그러나 아버님은 결국 북한의 지하교회 목사들과 연락을 취하시다가 발각돼 주모(음모의 주동자)급 죄명을 쓰시고 끌려가셨습니다. 그게 아버님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김 목사는 납북자 가족들이 북한 정권뿐 아니라 남한 정권에 의해서도 심각한 피해를 입은 '이중적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전쟁 발발 후 사흘만에 서울이 함락됐지만 이승만 정권이 "서울은 안전하니 안심하라"고 녹음된 방송을 한 뒤 한강다리를 폭파했기에 피신 기회도 잃은 데다가, 전후에도 납북 인사들이 간첩으로 파송될 가능성이 있다는 명분으로 공무원 취직을 제한받는 등 연좌제를 적용당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대중 정권 이후에는 햇볕 정책으로 인해 납북자 문제는 거론조차 기피당했다. 통일부에 항의 서한도 보내봤지만 "그동안 북측의 비협조로 납북자 명단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답장만 받았다. 하지만 납북자가족협이 발간한 자료에는 이미 82959명이나 되는 납북자의 신상명세가 기록돼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국군 경찰에 의해 피해를 입은 민간인은 조사한다면서, 빨치산들에 의해 고발당하고 잡혀가고 학살된 민간인은 왜 조사하지 않습니까? 인권은 보편적인 것이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김 목사는 한국 사회와 기독교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납북자가족의 고통과 그들에 대한 인권 침해에 대해선 무관심하면서 친북 좌경화되는 세태에 대해 울분을 터트렸다.
"교회가 납북자 인권에 무관심한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공의가 따르는 사랑'임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선 김정일 정권을 분명히 심판하십니다. 그래야만 북한 주민들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김정일과 북한 주민을 별개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 목사는 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무신론적 역사관에 입각해 출발한 것으로 기독교와 절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나 김정일 정권은 마르크스의 사상과도 거리가 먼 종교집단화된 정권이기 때문에 교회가 그와 타협하는 것은 크리스천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우리는 너무 국지적인 것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유대주의와 율법을 깨고 하나님의 사랑을 세계화시킨 것입니다. 김정일 정권만 보고 자신의 편견 안에만 갇혀 있지 말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예수의 마음으로 생각해야만 북한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김성호 목사는 서울신학대학과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대한기독교교육협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화곡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다가 은퇴한 뒤 현재는 납북자 인권 문제에 전력하고 있다.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