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하며 43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45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46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50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52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먼저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영어로는 Christian(그리스도의 사람)인데 이 말씀은 예수님의 구속하신 은혜를 믿고 회개해서 죄를 용서 받았고, 약속하신 성령, 보혜사를 선물로 받아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늘 시민권자로서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영생복락의 소망을 목적으로 믿음생활을 힘쓰는 사람, 이런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 죄 아래 태어나서 죄인이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으니 죄인의 결국은 멸망합니다. 어떻게 멸망하느냐, 구원을 얻지 못하고 죽는 사람은 음부라는 곳으로 가는데 음부라는 말은 게헤나, 하데스, 영어로는 jail(제일), 유치장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가두어 놓는 곳에 갑니다. 왜 갇혀 있어야 하냐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들리고 이제 이 세상에 구름과 흑암이 캄캄하게 임합니다. 해도 달도 별들도 빛을 잃고 반딧불이 있어도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흑암한 세상에 새벽별같이 유일한 빛으로 재림하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따라온 하늘나라에 가있던 영들이 각각 천사들에 이끌려서 자기 육체가 되살아나는 부활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첫 번째 부활이라고도 하고, 생명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1. 우리는 지금 육신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조건에 대한 기대가 탐욕으로 잔뜩 부풀어 있습니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잘 살면서 뻐기고 싶고, 남들 위에 군림하고 행세하고 싶고, 또 남들이 부러운 눈으로 보아 주기를 기대하는 이런 가식적이고 허황된 인생들, 우리도 예수님을 모르던 시절에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술 퍼마시고, 도박도하고 이성간에 음란, 간음하기도 하며 온갖 죄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와 가치는 육체뿐으로만 알았습니다. 바디(body), 프래쉬(flesh), 피지칼(physical)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몸만 알았습니다. 이 육적인 욕구는 짐승과 같아 짐승처럼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듣게 되면서 영적인 존재를 알게되고 영적가치에 기대를 갖게 되면서부터 하늘나라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되는것이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과정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살면서 이 육체의 자기가치에 전폭적인 기대를 모아 사느라고 외제라면 다 좋은 것인가 싶어 빚을 지면서까지 사들이며 치장하느라 빚에 시달리기도 하면서 어리석게도 껍데기뿐인 육체를 너무나 귀한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육체 속에 있는 영의 존재와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부터 껍데기보다는 알맹이의 가치를 기대하게 된 것입니다. 내 영이 잘돼야 내가 모든 일이 잘되고 또 하나님 앞에 쓰임받을 소망이 확실할 때, 하나님 손에 붙들려서 쓰임 받는 과정이 그 인생 영적구원의 보장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능하신 손에 붙들려 쓰임받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쓰임 받는 사람은 아무도 그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29에 보면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는 말씀을 하시고 30절에 보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The Father and I are one.)"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셔서 내게 관심을 보이시고 진리와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로 불러들이셨을까. 이것은 나에게 육체가 전부가 아니고 그 속에 들어있는 영이 하나님과 같은 것이니까 그 영이 하늘나라로 되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명절 끝 날, 곧 큰 날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전 안에 은으로 된 항아리가 있습니다. 은은 변치 않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바가지로 물을 떠서 은 항아리에 붓게 하는 절기를 지키면서 훗날 영원한 소망을 위하여 생명수로 오실 예수님을 생각하며 맞이할 준비를 서두르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은항아리에 들어있는 실로암 못물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옛날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이 시나이 벌판을 지날 적에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백성들을 르비딤이라는 곳에 머물게 했는데, 그 백성들이 물이 없는 곳이어서 우리와 우리 가축들이 목이 말라 죽겠다고 손에 손에 돌을 들고 모세를 때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주여, 이 백성들에게 내가 어찌해야 합니까,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하겠나이다"(출17:4)했을때 하나님이 모세에게"너는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출17:6~7)하신 말씀대로 호렙산으로 올라가서 큰 반석 주위에 장로들을 둘러 세우고 지팡이로 반석을 치자 물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악세상이던 애굽에서 공중 권세잡은 마귀를 상징하는 파라오(애굽왕 바로)의 멍에와 채찍에서 해방시켜 홍해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의 능력을 못믿고 어려움이 조금만 닥쳐도 모세를 원망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다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과정을 만들어 그들을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교회 이스라엘의 목자였고 하나님이 세우시고 붙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사자였고, 그 백성은 모세에게 맡겨진 양떼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하시는대로 모세는 그 양떼를 이끌고 가나안으로 옮겨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물 없는 곳으로 모세에게 명하여 그들은 인도하게 했던 것은 그동안 홍해를 건너고 애급에서 열 가지 재앙을 체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자기 독단적인 결정으로 가나안을 향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시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과정에 있다는 것을 이 백성들로 알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물이 바위에서 솟아나는 것을 장로들이 똑똑히 보게하심은 백성들의 우두머리격인 그들이 먼저 알고 깨우치기를 바람입니다. 바위에서 물이 나옴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이며 실질적인 하나님의 권능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목자를 보내시고 세우셔서, 그를 붙들어 택한 백성들을 주변에서 불러들여 그 목자에게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목자들은 그 양떼를 책임지고 길러내어 하늘나라 보내기 위하여 책임목회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자기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인도하심대로 한 것임을 깨달아 모세를 따르는 이들 중에 인간 모세가 아닌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이 쓰시는 신실한 목자로 알아 따르는 이들은 그 걸음이 신나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고전10장 4절에 보면 그 반석을 곧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우리에게 생수를 쏟아 부어내는 이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후 1,600년 후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고 하셨습니다. 성전 안에 있었던 은항아리의 뜻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은30에 팔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임 당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사명을 감당하신 후에 그에게서 생명수가 흘러나오시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속물로 못 박히시지 않았다면 그를 통하여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실상을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하늘나라에 가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오리라고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이 오실 수 없다. 내가 가면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과 교대하기 위하여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내세소망의 확실한 증거를 남기시고 하늘나라 올라가셔서 보혜사라는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7下~39上)하셨습니다.
3. 예수님이 죽임 당하시기 전이기 때문에 아직 성령이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할 때였습니다. 무리 중에서 혹은 이 사람이 참 그 선지자, 혹은 그리스도,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고 성경에 다윗의 촌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난 줄도 모르고 갈릴리 사람으로 오해하고 착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인하여 무리중에 쟁론이 생겼습니다. 그리스도다, 아니다하면서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도 있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이 예수를 잡으려 했냐면 대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 장로들의 종들이 예수를 잡아오라는 명령에 예수를 잡으러 와서 예수님의 말씀에 압도당해 예수님 잡기보다는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의 말씀에 잡혀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들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어찌하여 잡아오지 못하였냐고 묻자"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기를 너희도 미혹되었느냐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말씀에 점령 당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굴복하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 즉 예수님과 예수님 말씀에 점령 다한 이들 모두를 저주를 받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 밤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요3:1이하)가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할 수 없지 않냐고 예수님의 입장을 변호하고 나섰습니다. 상당히 위험한 모험을 한 것입니다. 이 사람도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 니고데모도 성령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음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율법에는 분명히 본인을 불러 그 사실이 확인 되었을 때 정죄하는 것이 율법의 원칙인데, 사실여부를 확인해 보지도 않고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속단할 수 있느냐는 니고데모의 말에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는 한 마디는 "너도 예수 패거리냐"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쟁이라는 말을 듣기가 좋습니까? 싫습니까? 지독한 예수쟁이라는 말을 들으면 신이나고 기뻐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인이 되어져 있다는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여기 본문과 같이 니고데모처럼 담대하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의 입장을 옹호하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9절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도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으로서 니고데모의 친구였습니다.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자신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서 장례를 치를 때 니고데모와 요셉이 함께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내려서 니고데모가 유향을 100근이나 가지고와서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예수님의 시체가 썩지 않게 모두 발랐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죽은 목숨을 살리고 문둥병을 나음 받고, 앉은뱅이도 나음을 입었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 사후에 예수님 시체걱정한 사람이 없었는데 요셉과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면서도 죽음을 무릎쓰고 예수님의 시체를 지극정성으로 장례를 치뤘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이긴 했지만 유대인이 두려워서 은휘(隱諱)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은휘라는 말은 가리고 나타내기를 꺼린다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인 되어져가는 과정은 여러분들의 생활속에서 점검이 가능합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예수님의 시각으로, 예수님의 입장에 서서, 예수님처럼 말하게 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을 보던지 불신앙적인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말하고 하는 것은 지옥가기를 재촉하는 불신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모세를 따라가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 모세를 불만 불평하던 사람들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모세에게 순종하고 모세의 입장에 함께하기를 힘썼던 여호수아와 갈렙, 그 두 사람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4장 4절에"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붙어서 떨어지지 않아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본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하늘나라 가기 위함이고 하나님이 살리시는 은혜로 살기 위함입니다. 모든 입장을 예수님의 입장, 교회의 입장, 신앙인의 입장에 서서 살아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편에 선다면 마귀에게 사로잡히고 마귀 앞잡이 노릇하다가 그와 함께 유황불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다함께 그리스도인이 되어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