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평양에 사는 백지용이라는 사람에게 외동딸이 태어났습니다. 백지용은 아들이 아니라, 딸이어서 실망한 나머지, 딸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그냥 '애기'라고 불리우며 자랐습니다. 이름이 백애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14살이 되어, 한 남자의 아내로 출가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병약한 사람이었고, 결혼한지 2 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때부터, 여인의 이름은 백애기에서 백과부가 됩니다. 결국, 백과부는 시댁에서 쫓겨나 어머니와 살게 되었고, 살기 위해, 그리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습니다.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입고 싶은 것 안 입고, 하고 싶은 것 안 하는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돈이 생길 때마다 땅을 샀습니다. 사기를 당해 목숨을 끊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동네 교회 성도들의 전도와 보살핌을 받아, 신앙을 갖게 되었고, 받은 사랑과 신앙의 힘으로 고난을 극복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백과부가 산 넓은 땅에 시멘트의 재료가 되는 성분이 발견되면서, 그녀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백과부의 나이 60세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때, 백과부는 남편의 무덤을 찾아, 무덤 앞에서 여생을 뜻있게 살기로 결단합니다. 그래서, 맨 처음 시작한 일이 동네에 매년 홍수가 나서 건너기 어려운 강에 돌다리를 놓는 선행을 합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사람들은 그녀를 더 이상 백과부라 부르지 않고, 백선행이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세운 돌다리도 백선교라 불리게 됩니다.
이후 백선행은 교육사업, 학교사업을 후원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특히, 기독교 학교들을 많이 후원하였습니다. 평양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들이 거의 모두 백선행의 기부금으로 운영되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선교사가 세운 광성학교에 전답 1만 4천평을 기증하였고, 13만원을 기증하여, 광성학교 재단법인을 설립하였습니다. 또 장로교에서 운영하는 숭현여학교에 전답 2만 6천평을 기부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덕보통학교에 6천 원, 숭인상업학교에도 1만 3천원 상당의 땅을 기부했습니다. 심지어, 평양에 조선인이 사용할 수 있는 공회당과 도서관을 건축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독립운동가 조만식 선생의 부탁을 기꺼이 후원할 정도였습니다. 백선행이 85세에 소천하기까지 그녀가 기부한 금액은 대략 31만 6 천원이었는데, 이 돈은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316억원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백선행처럼, 60세에 떵떵거리며 살만해졌다면, 우리는 어떤 결단을 내렸을까요? 백선행과는 전혀 다른 마음을 가졌을 것이 뻔해서 상상하고 싶지 않습니다. 먹는 것도 거기서 거기고, 입는 것도 거기서 거기며, 사는 것도 거기서 거기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 무의미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헛된 것들을 시기 적절하게 선한 일에 사용한다면, 헛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연말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시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목표를 세우고, 실천을 계획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백애기가 백과부가 되고, 백과부가 백선행이 되었던 것처럼, 진정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 있는 인생으로 기억되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