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Photo : 기독일보) ’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해방과 더불어 한반도는 38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국은 이북 지역은 소련에 의한 공산국가로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고 이남은 미국의 군정을 통해 자유선거를 치루어 1948년 8월15일에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한 대한민국으로 건국되었다. 이처럼 남과 북으로 완전히 두 개의 나라로 분국된 지 2년 만에 김일성의 무력으로 적화 통일을 이루기 위해 남침한 것이 6.25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이북 지역에서는 약 5년간의 공산 통치에 의한 공산체제를 경험하였고 이남은 전쟁을 통해 대부분의 지역이 공산화되어 약 3개월 동안 공산군에 의한 통치를 통해 공산화의 사회가 어떤지를 몸소 체득하면서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와 평등과 특히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경험하였다. 남과 북의 모든 국민들은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공산주의에 대해 바른 이해와 분별력을 갖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과 몰이해와 시대적 조류에 의해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많은 지식인들과 그 가운데 적지 않게 기독교인들도 상당수가 있었다.

그러나 짧은 기간 중에 남과 북의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극명한 비교 판단과 비판 의식을 갖게 되어 이념적 논쟁을 새로이 정립할 수 있었다. 특히 6.25전쟁은 동족상잔의 참혹한 비극이었지만, 1953년 전쟁을 끝낸 후 기독교인들은 가일층 반공사상과 자유의 가치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념적 갈등과 혼란에 대해 교회가 선도 역할을 해야 하는 시대적 배경을 갖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해방 이전에 러시아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인사들 가운데 러시아와 중국의 공산주의에 영향을 받은 정치와 교회 계통의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뿐만 아니라 해방 후 저들은 남과 북의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공산주의 사상과 정치활동에 관여한 인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전쟁이 종식되는 과정에 자진하여 월북하거나 납북된 인사들도 있었고 전쟁 중에 이남으로 월남한 인물들도 있었다.

전쟁이 종식된 후의 이남의 반공정책은 더욱 심화되었고 정부 정책이나 일반 주민들 중에 특히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와는 절대로 함께 살 수 없다."라는 보다 철저한 반공주의로 고착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주의가 그 시대의 보편적인 이념 가치로 수용하여 교회들도 이에 앞장섰다. 그 이유는 교회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이북에서나 전쟁 중에 너무도 많은 피해를 보았기에 반공주의 정책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기독교의 사상과 교리에도 반하였기에 이남의 교회와 피난 온 이북 교회들은 반공 정책에 선봉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반공 정책에 교회의 지도자들도 누구보다 많은 상처가 있었고 교회를 이북에 두고 온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반기독교적인 공산주의 타파와 반공 정책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대표적 인물로는 한경직, 김재준, 송양원, 김홍도, 김준곤 목사들이 계승하였다.

이에 반해 북한 지역의 김일성은 1953년 종전 후 제2의 건국을 하듯 통치권의 강화와 체제의 안정을 위해 더 강압적인 통치 기반을 조성해 나가면서 전쟁 패배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외부 세력으로 돌리며 이남에서 남로당을 구축했던 박헌영(1900~1955)같은 경쟁적 정치인들을 제거하였다. 김일성의 남침과 점령의 실패는 그 당시 김일성 공산정권에 협력 관계를 갖고 있었던 이북 교회들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전쟁 중에 국군이 북진하여 잠시 점령했던 기간 동안 이북의 극단적인 일부 기독 청년들이 곳곳에 잔류하였던 공산분자들을 처벌했던 사실과 특히 평양 수복 중에 국군과 유엔군에 협조했던 주민과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앙심을 품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그 땅에 반 공산 세력과 기독교인들을 완전히 발본색원하여 말살하는 숙청을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전세가 바꾸면서 국군과 유엔군이 이북 지역에서 후퇴할 때에 약 5년 동안 공산치하를 체험했던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오게 되어 이남 곳곳에 그들의 교회들을 개척하였고 누구보다도 공산주의와 그 체제를 경험하였던 그들은 반공 대열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분단의 비극은 동족상잔이라는 전쟁을 야기했으며 그 배후에는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체제의 대립과 충돌이 있었다. 그 격동의 역사 속에 체득된 이념과 신앙이 민족정신이라는 자산으로 나이테처럼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