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Photo : 기독일보) ’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1950년 10월에는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 수복 후에는 북진을 거듭하여 평양을 비롯한 이북의 대부분의 지역을 회복함으로 그 지역 교회들도 다시 자유로운 신앙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감격과 기쁨도 한 달여간의 잠시였다. 1950년 11월 26일에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참여함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시작함으로 이북의 온 교회들을 다시 불안하였고 앞날이 어떻게 될지 두려워했다. 그로인해 그동안 교회 재건 계획은 모두 중단되고 말았다.

이 당시에 평양 '서문밖교회'에서는 새로 조직된 평안도 노회가 주관하는 연합부흥회가 개최되었는데, 부흥 강사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도망치듯 군대와 함께 평양을 떠났다. 이에 교인들은 크게 낙담하였다. 그날의 집회에는 통성기도로만 진행되었다. 통성기도가 점차 통곡의 기도로 변하다가 울음바다로 변했다. 중공군이 참전하여 전세가 역전된 소식을 전혀 몰랐던 저들은 왜 강사 목사들이 안 나타났는지를 몰랐던 것이고, 미군과 함께 올라왔던 목사들은 그 소식을 듣고 바로 그 군대와 함께 다시 남으로 내려간 것이었다.

그러나 이북 지역에 남아있었던 대다수의 교역자들은 전세에 대해 낙관적인 판단을 하였다. "설마 유엔군이 평양을 버리랴?"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였다. 이는 중공군의 침략 규모가 얼마나 큰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때 피난길에 오르지 않은 주민들과 교인들은 다시금 크나큰 전쟁의 불길 속에 갇히게 되었다. 유엔군은 다시 평양 시가지를 폭격하므로 교회와 학교들도 폭격을 맞아 파괴되었다. 그로 인해 많은 주민들과 평양 시민들은 피난길에 올랐으며 이때 유엔군이나 국군을 따라 남으로 내려온 기독교인들도 상당수에 달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산 치하에서 살아 보았기에 다시 그런 공포스런 치하에서는 살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의 인민군은 10월에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하자 전세에 밀리게 되어 퇴각하면서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일반 성도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집단 학살을 하고 평양을 떠났었다. 그 중에는 평양신학교 이성휘 목사, 평양남문교회 이학봉 목사, 조만식 장로, 김익두 목사 등과 지난날 조선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여 김일성 정권에 힘을 보태주었던 목회자들까지도 처형하였다. 김일성 군대는 이들에 대한 이용 가치가 없어지자 목사들을 창고에 집어넣고 불을 질러 끔찍한 살육을 자행했다. 이는 1919년 만세 운동 때에 일제 경찰이 제암리의 교회 성도들을 교회에 집합시켜 놓고 불을 질러 살생한 끔찍한 만행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처럼 동족임에도 잔악무도한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한편 강원도 원산에서도 그 같은 잔인한 만행을 1950년 10월 10일에 기독교인 500여 명을 한 곳에 모아놓고 산 채로 생매장하였다. 이처럼 북한 공산 정권은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을 가졌고 저들은 미국 편이라는 인식을 갖고 목회자들과 믿음의 성도들을 잔혹하게 처형함으로 그들은 거룩한 순교자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이는 6.25 전쟁 중에 교회사적으로 볼 때에 가장 큰 규모의 불행한 참사였고 희생이었다.

이러한 전쟁 중에 국군과 유엔군이 이북 지역의 인민군을 몰아내고 회복했던 때는 잠시였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방으로 퇴군할 때에 이북 곳곳에서 군인들과 같이 남하한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1950년 11월 25일에 유엔군과 국군은 압록강 지역과 함경도 함흥 북단까지 진격을 했었다.

그곳을 유엔군이 점령하자 기독교인들은 미군 군목으로 참전한 해롤드 보켈(Harold Voekel) 선교사를 만나게 되자 그에게 "우리의 생명과 우리 자녀들의 생명이 당신의 수중에 있습니다. 우리들을 당신과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라고 호소하였다. 함흥의 어느 작은 교회에서 교인들이 함께 모여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교인들이 눈물을 흘리는 동안 교회 지도자는 "주여! 우리를 압박에서 구해 줄 모세를 보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보켈 선교사가 그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에 교인들은 그를 보자 "모세가 왔다!"라고 소리쳤다. 얼마 후 그들은 유엔군의 도움으로 함경남도 흥남포에서 철수할 때에 함께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고 한다.

6.25전쟁 중에 이북의 약 400여만 명의 피난민들이 수개월에 걸쳐서 남쪽으로 자유를 찾아 출애굽하듯 월남하였다. 그들 중에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성도들이 있었고 그들은 남으로 내려와 다시 교회를 개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