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Photo : 기독일보) ’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한국의 교회사에서 가장 수치스런 역사는 1938년에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된 제 27차 조선예수교 장로교회 총회에서 온 교회들이 마침내 일본 총독부 주도하에 강요된 신사참배에 굴종하여 하나님을 배도한 일이었다. 7년 후인1945년 8.15에 일본이 미국과 소련에 항복함으로 우리 민족은 36년간의 식민지하에서 벗어났지만, 바로 미. 소의 카이로회담에 따라 38선을 기준으로 분단되었다. 이북 쪽은 소련의 군정 하에 들어갔고 이남은 미군의 군정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북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은 바로 공산국가 수립을 위한 수순을 강압적으로 행하였고 여기에 소련 극동지역 88여단 소속의 김일성이라는 장교를 내세워서 공산 정부 수립을 강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이북의 공산정권 수립을 일방적으로 주도한 세력은 소련 군정의 장교들이었다. 김일성은 1945년 9월 18일 33세의 나이로 김책과 60여 명의 공산주의 고려인들과 함께 환국하였다. 이들은 공산정부를 세우는 데에 실무를 맡은 정치. 행정을 맡아 주도할 인사들이었다. 소련은 애초에 이북 지역을 공산화하려는 목적을 갖고 치밀한 준비를 하였으며 이를 진행할 통치 체제는 스탈린을 수반으로 한 소련 최고 사령부이고 그 다음은 연해주 군관부 사령부의 스티코프이며, 그 다음 하급 기관은 평양 주둔 소련 정치 사령관 레베데프이며 그 다음 하급 기관이 소련민정 관리부 로마넨코 소장이었고, 제일 하급 기관이 김일성을 수반으로 한 북조선임시 인민위원회로서 상부 하달의 명령 계통으로 진행되었다.

소련 군정은 이북 도민들에게 공포 정치를 하기 위해 평양에만 17개의 비밀처형장을 설치하여 소련 군정에 반발하며 협조하지 않는 인사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납치와 처형과 고문을 가하였다. 이때에 평양을 비롯한 곳곳에 주둔한 소련군은 민간인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아녀자들을 강간하며 강도짓을 행함으로 그 당시 이북 주민들은 공포에 시달렸으며 이때 이런 만행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 온 이북 주민들이 많았다.

소련의 주도면밀한 공산화 작업에 위기를 느낀 이북 지역의 교회와 목사들 중에는 이에 대항할 정치 당을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신의주의 한경직 목사와 윤하영 목사였다. 이들은 1945년 9월에 그 지역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기독교사회민주당'을 결성하였다. 평양에서는 1946년 11월에 평양 감리교의 신석구, 송정근, 배덕영과 장로교에서는 김화식, 감관주 목사가 중심이 되어 고한규 장로를 당수로 한 '기독교자유당'을 결성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소련 군정은 바로 이들 40여 명을 구속하였고 일부 인사는 행방불명이 되거나 옥사하였다.

소련 군정은 이북 주민들에게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한 후 철군할 것을 약속했지만 점차 공산정권 수립이 구체화하였다. 이에 기독교 지도자들과 조만식 장로를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소련군정은 이들에 대해 경계심을 품게 되었으며 김일성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회의 반공산주의 정서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들을 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부르주아로 몰아 협박하며 이들을 포섭하려 하였다. 군정 초기에 교회에 대해 물리적인 제재가 없다가 점차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소련군 사령부는 항일 민주 정당의 등록을 지지하며 반공 친미를 표방하는 단체나 개인을 제거하도록 명령했다. 이 군사령부는 조만식의 '건국준비위원회'를 해체시키고 공산주의자와 비공산주의자가 각각 절반씩 참여하는 '인민정치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에 따라 10월 28일에는 '5도행정국'으로 결성되었다.

해방 후 6.25전쟁 이전까지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에 공산 체제를 구축하는 동안 교회와 종교인들에 대해 한편으로는 이들을 이용하기 위한 회유 공작을 벌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의 사회적 영향을 점차 소멸시킴과 아울러 종교 행사와 종교 의식까지 가급적 철저히 봉쇄하여 근절시켜 나가려는 이중적 태도를 드러낸 시기였다.

공산 정권은 민족주의 세력으로서 종교인을 포섭하여 통일 전선을 구축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 정권 수립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당시 이북 내에서도 가장 심각하게 양 진영 간에 갈등과 대립된 문제가 바로 신탁통치 사안이었다. 소련 군정은 이를 둘러싼 반탁의 입장을 천명하는 조만식 장로를 제거하고 김일성을 전면에 내세워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1946년 초부터는 북한 정권이 북한의 각 종교와 사회단체 대표를 초빙하여 자신들의 정치 노선에 지지와 협력할 것을 요구하는 모임을 주도하며 종교계를 끌어 드리려 하였다. 이에 많은 교회 지도층들이 공산정권 수립에 가담함으로 제2의 신사참배를 범하는 죄를 짓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