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훈련소에서 병사 후보생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지킬 수 있도록 철저하게 자신을 무장하여 연습하고 연마한다. 전장에서 피를 적게 흘리기 위해서이다. 훈련소에서 원리원칙을 지켜서 생명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전장에서의 기술, 적응, 분석, 등등을 배우면서 훈련소에서 전장의 상황을 상상한다.
막상 전장에 뛰어들다보면, 많은 훈련소에서 배웠던 원리원칙이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훈련소에서 막 졸업한 풋내기 일등병들이 전장에 투입될 경우 생명을 잃는 경우가 흔한 것이다. 현지 적응력이 필요하다. 전장의 현지의 상황, 순발력 있게 대처하는 능력, 직면한 상황을 재빨리 분석하여 다음 행동을 취하는 것 등등. 이러한 적응력이 자연스럽게 되려면 적절한 시간이 요구된다.
과거 전쟁을 보면, 적들과 아군들이 마주 보고 있다가 대표자들이 나와 전쟁의 불가피성을 이야기하면서 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아니면 전쟁포고를 먼저 한다. 그래서 양편의 전략을 모두 볼 수 있게 하거나 상대방이 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넓은 평지에서 행군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면서 전쟁의 기선을 제압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시민전쟁인 남북전쟁을 보거나 18세기 유럽의 전쟁들을 보면, 양편이 모두 한 자리에 섰다가 한 편에서 총을 가하고, 총알을 장전할 동안, 상대편은 화력을 발한다. 그리고 다시 이편에서 총알을 가하고, 상대편은 기다렸다가 다시 화력을 발한다. 게릴라전이나 테러전을 하는 현대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과거의 목회는 순수했고, 성도들이나 사람들도 요즈음 사람들과 다르다. 바쁘고, 종종거리고, 급하고, 불안하고, 쫓기는 기분으로 살아가는 듯하다. 내일을 예측하지 못한다. 화폐개혁, 행정수도 이전, 테러전, 등등은 우리 사회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도 불안하게 만든다. 놀랍게 발전하는 사회이지만 그만큼 괴리를 느끼곤 한다.
목회 현장 역시 그러하다. 과거의 사회를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목회에 임하는 것은 정말 순수한 목회자들로 여겨진다. 생각만큼 다르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훈련소에서 배운 것과 같다. 신학과 목회는 다른 영역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훈련과 야전과 같은 듯하다.
그래서 철두철미하게 개혁신앙을 신학교에서 배우지만 현장목회에 가서는 펠라기안(pelagian), 알미니안(arminian), 오순절(pentacostal), 또는 영성주의(spiritual) 스타일로 일삼는다. 목회 현장에서는 생존의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경쟁시기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올바른 원리는 그렇게 무용지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현장 목회에 당면한 문제를 풀고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목회학을 배우곤 한다.
과연 목회와 신학은 별문제로 남아야만 하는가?
아니다. 신병이 원리원칙대로 야전에서 행하는 것이 힘들다.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원리원칙이 있다. 이처럼 목회자들이 신학시절에 배웠던 반드시 지켜야하고, 넘지 말아야하는 원리적이고 중추적인 진리들이 있다. 그것을 지키면서 가끔씩 벗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는 신학의 융통성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가끔씩 실수하면서 현지 적응하는 것처럼 목회 역시 현장목회에서 요구되는 일을 하다가도 다시금 신학적 점검을 하면서 제자리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그래서 올바른 준거기준인 개혁신학이 요구된다. 하지만 제한 없이 필요한 것만을 취하는 목회 현장에서 빚어지는 행위는 후에 가서 후회하는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이다. 원리는 정하여 반드시 지키되 현장목회에서 적절한 방법들을 사용한다. 사용하는 조건도 늘 신학적 점검을 받을 필요가 있다.
또 다시 말하면, 말씀 속에서 증명된 확신 속에서 행해야만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훈련은 생명을 지키는 법을 배우지만, 전장은 생명을 죽이거나 지키는 상황이다. 신학은 성도의 신앙을 지키도록 하는 방편이다. 목회는 신앙을 전하고, 가르치고, 그리고 지키도록 하는 현장이다. 늘 융통성 있는 신학적 적용 자세가 필요하다.
라은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막상 전장에 뛰어들다보면, 많은 훈련소에서 배웠던 원리원칙이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훈련소에서 막 졸업한 풋내기 일등병들이 전장에 투입될 경우 생명을 잃는 경우가 흔한 것이다. 현지 적응력이 필요하다. 전장의 현지의 상황, 순발력 있게 대처하는 능력, 직면한 상황을 재빨리 분석하여 다음 행동을 취하는 것 등등. 이러한 적응력이 자연스럽게 되려면 적절한 시간이 요구된다.
과거 전쟁을 보면, 적들과 아군들이 마주 보고 있다가 대표자들이 나와 전쟁의 불가피성을 이야기하면서 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아니면 전쟁포고를 먼저 한다. 그래서 양편의 전략을 모두 볼 수 있게 하거나 상대방이 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넓은 평지에서 행군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면서 전쟁의 기선을 제압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시민전쟁인 남북전쟁을 보거나 18세기 유럽의 전쟁들을 보면, 양편이 모두 한 자리에 섰다가 한 편에서 총을 가하고, 총알을 장전할 동안, 상대편은 화력을 발한다. 그리고 다시 이편에서 총알을 가하고, 상대편은 기다렸다가 다시 화력을 발한다. 게릴라전이나 테러전을 하는 현대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과거의 목회는 순수했고, 성도들이나 사람들도 요즈음 사람들과 다르다. 바쁘고, 종종거리고, 급하고, 불안하고, 쫓기는 기분으로 살아가는 듯하다. 내일을 예측하지 못한다. 화폐개혁, 행정수도 이전, 테러전, 등등은 우리 사회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도 불안하게 만든다. 놀랍게 발전하는 사회이지만 그만큼 괴리를 느끼곤 한다.
목회 현장 역시 그러하다. 과거의 사회를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목회에 임하는 것은 정말 순수한 목회자들로 여겨진다. 생각만큼 다르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훈련소에서 배운 것과 같다. 신학과 목회는 다른 영역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훈련과 야전과 같은 듯하다.
그래서 철두철미하게 개혁신앙을 신학교에서 배우지만 현장목회에 가서는 펠라기안(pelagian), 알미니안(arminian), 오순절(pentacostal), 또는 영성주의(spiritual) 스타일로 일삼는다. 목회 현장에서는 생존의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경쟁시기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올바른 원리는 그렇게 무용지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현장 목회에 당면한 문제를 풀고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목회학을 배우곤 한다.
과연 목회와 신학은 별문제로 남아야만 하는가?
아니다. 신병이 원리원칙대로 야전에서 행하는 것이 힘들다.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원리원칙이 있다. 이처럼 목회자들이 신학시절에 배웠던 반드시 지켜야하고, 넘지 말아야하는 원리적이고 중추적인 진리들이 있다. 그것을 지키면서 가끔씩 벗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는 신학의 융통성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가끔씩 실수하면서 현지 적응하는 것처럼 목회 역시 현장목회에서 요구되는 일을 하다가도 다시금 신학적 점검을 하면서 제자리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그래서 올바른 준거기준인 개혁신학이 요구된다. 하지만 제한 없이 필요한 것만을 취하는 목회 현장에서 빚어지는 행위는 후에 가서 후회하는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이다. 원리는 정하여 반드시 지키되 현장목회에서 적절한 방법들을 사용한다. 사용하는 조건도 늘 신학적 점검을 받을 필요가 있다.
또 다시 말하면, 말씀 속에서 증명된 확신 속에서 행해야만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훈련은 생명을 지키는 법을 배우지만, 전장은 생명을 죽이거나 지키는 상황이다. 신학은 성도의 신앙을 지키도록 하는 방편이다. 목회는 신앙을 전하고, 가르치고, 그리고 지키도록 하는 현장이다. 늘 융통성 있는 신학적 적용 자세가 필요하다.
라은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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